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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언제 컨디션 좋은 날이 있었냐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울음이 나는, 슬픈 감정에 휩싸였다. 그의 눈빛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그도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나갔다 오겠다며 아이에게 인사하다 말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래, 호르몬 때문이네 호르몬. 그럴 땐 별일 아닌 건 그냥 넘겨 버리고 그래."

하며 나를 안고 토닥였다. 어릴 때처럼, 우는데 누가 토닥이니 더 눈물이 차올랐다.




30분쯤 전, 그날따라 유난히 몸도 마음도 처져있던 중 조금 기운을 내보려고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워낙 바쁘게 계속 뭔가를 하며 지냈기에, 잠깐인데도 누워서 유튜브를 보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금방 또 일어난 참이었다.

"와, 오늘 안 그래도 근육통에 온몸이 쑤시는데 그날까지 겹쳤네. 컨디션 진짜 별로다."

정말이었다. 안 하던 운동을 시작해서 온몸이 쑤시는 데다가 날도 꿀꿀하고, 생리까지 시작했다. 싫어하는 조건이 모두 갖춰졌다. 그래도 진심 다해 징징 거릴 군번도 아니니 나름 밝은 척하며 말을 꺼냈다.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듣고 싶은 류의 대답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 들려왔다.


"니가 언제 컨디션 좋은 날이 있었냐"


그는 무심히 평소 하던 말을 또 했을 뿐이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본인이 아프다 할 때 내가 그런 말 한번 한 적이 있던가. 열이 나면 열을 재주고, 약을 가져다준다. 허리가 좋지 않아 자주 몸이 쑤시는 그에게 난 늘 위로와 공감의 대답을 했었다. 주로 여자들이 많이 한다는 '공감의 대화'. 남편에게 기대한 게 잘못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던 터라 바로 날이 선 말로 응수했다.


"내가 언제? 어제도 컨디션 좋았는데? 왜 안 좋다고 하면 꼭 그렇게 말해? 내가 언제 맨날 그랬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남편. 그러면서도 미안해하거나 했던 말을 정정하진 않는다.


"어, 너 맨날 안 좋잖아. 그래서 힘들겠다는 뜻으로 말한 건데?"


이게 무슨.. 아니다.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난 기분이 나빴다고, 그냥 그러냐 하면 되는 거 왜 꼭 그렇게 말을 해야만 했냐고 따졌다. 남편은 우긴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그냥 네가 맨날 안 좋다고 하는 건 사실이고, 지금 한 말은 그게 걱정돼서 한 말이라고. 내가 이상한 건가. 내 귀엔 빈정대는 걸로 들린다고 했다. 이제부턴 나에게 집요하다고 한다. 별거 아닌 걸로 꼭 가끔 이렇게 집요하게 추궁한다고. 내 입장에선 당신도 집요하다 이 사람아, 진짜 빈정댄 게 아니라면 그런 거 아니라고, 그렇게 들렸으면 미안하다고. 말투를 정정해 줄 생각은 전혀 없는 사람.


하지만 싸울 힘도 없었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10년 넘게 살다 보니, 여기서 몇 마디 더 나가면 싸움이 시작된다는 걸 안다. 거기서 바로 멈췄다.


"그래, 내가 그날이라 호르몬이 문젠가보다."


꼬리를 내렸다. 호르몬 탓으로 돌린다. 분명히 얘한테도 일부 문제는 있다. 평소 같음 적당히 넘겼을 수도 있는 걸 더 짜증이 확 나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책임을 돌리고 나서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고, 숨기려 했으나 들켜 버렸다. 이왕 들킨 거 아닌 척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그는 나가야 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었다.




사실 아침부터 우울했다. 아니, 요 며칠 우울의 기운이 나를 짓눌렀다. 신문에 있는 오늘의 운세 따위를 봤다면 이번 한 주는 '구설이나 관계를 조심할 것' 등의 상투적인 문구가 적혀 있을 것 같은 시기였다. 어떤 특별한 구설수에 오른 건 아니지만 사소한 것들이 애매하게 신경을 돋궜다. 협력사 직원 한 명은 굉장히 심기를 거슬리게 자꾸만 예민한 문장으로 털끝을 건드려 왔고, 아이 학원 선생님은 그녀야말로 무슨 히스테리인지 그간 보이지 않던 모습을 보이더니 곧장 또 자진 사과를 했다. 안 그래도 바쁜데 아이 일이니 더 곤두서게 되고, 새로운 학원을 알아봐야 했다. 잘 되어가던 또 다른 일은 나의 욕심과 조급증으로 정체 중이었고, 단톡방에선 다수를 향해 웃으며 돌려까기 하는 동네 엄마를 지켜보며 짜증이 치솟았다. 컨디션 좋을 때 벌려 놓은 일들은 수습되지 않은 채로 나를 짓눌렀다. 모두 내가 하기로 한 일이지만 예상 밖으로 힘겨웠고, 내 역량이 이 정도인가 자괴감도 들었다. 이렇게 쉽사리 무너지는 나약한 인간이었나, 이 정도로 자괴감이 드는 건 또 뭔가 하는 생각에 더 깊이 내려갔다. 종일 앉아서 일하는 탓에 허리가 약해지고, 다리까지 저려왔다.


미친 사람처럼 바로 운동을 등록하고 트레이너에게 몸을 맡겼다. 그간 그렇게 미루고 미루던 걸, 1분 만에 결심하고 바로 가서 카드를 긁어 버렸다. 애들 학원비에 생활비에 안 그래도 빠듯한데 좀 더 벌면, 조금만 더 잘되면 내 운동 따위에 투자하자는 결심 따위 다 필요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40이 되어 그런가, 다들 이맘때 그런다던데 하는 생각을 하며 이번엔 또 나이한테 핑계를 돌리는 건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무슨 개소리냐, 고 박완서 작가님은 나이 마흔에 등단했다고, 40이면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고 큰소리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냥 나는 요즘 정체되고 울적한 시기인 것, 그뿐이었다. 이유는 다 내 안에 있었다.


남편에게 화살을 돌린 것도 평소 같았으면 가볍게 듣고 받아쳤을 수도 있고, 업체 직원의 말투 또한 그랬다. 듣는 나의 기분, 보는 나의 생각을 조금만 달리해도 그리 들리고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 우울감이 몰려올 때, 무기력함이 밀려올 때는 무슨 이유도 필요 없는 것 같다. 세상이 느리게 보이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특히 가장 편하고 만만한 아이들에게 불똥이 튄다. 그게 가장 미안하고 한심스럽다.


그래도 하루는 또 간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거고, 예쁜 아이들은 밝은 하루를 시작하겠지. 날씨가 좋을 수도 있다. 그럼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진 내가, 그리고 당신이 웃으며 서 있을 거다.


흘러가듯 하루를 보내자. 최선을 다해. 우울할 땐 우울해하고, 기쁠 땐 기뻐하면서.



출처.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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