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제주 4.3 평화문학상 시 당선작
흰 문장을 읽는다
묵음의 무게가 심장보다 무거워 주저앉은,
매번 다른 말로 읽히는 줄거리의 결말은 열려있다
어느 날 돌아보면 주어가 바뀌고 서술어에 서술어가 붙어 안긴문장은 목적어를 내게 물어온다
기록과 기억 사이
지워야 완성이 되는 이 문장의 방식은 믿음을 요하는 신앙에 가깝다
아버지가 생략된 나에게 봄은 언제나 바깥이었다
술잔을 돌리는 손목 끝에서 그려지는 동그라미는 떠난 자의 영혼, 어떤 부재는 너무 구체적이어서 더듬다 보면 젖기도 했다
무명천으로 동여맨 얼굴을 더듬듯 백비*를 읽는다 울음에서 시작된 짐작들로 채워진 이 침묵의 경전은 나비가 되기 전에 읽어야 할 생의 목록일진대,
환부를 감싼 흰빛 위에 빽빽이 채워진 말
교열이 어긋난 이 비문을 누가 해독해 줄까
등 돌린 괄호에 질문이 잠기고
부재 속 당신은 익명의 빈칸을 서성이고 있다
*제주 4·3 평화공원 기념관 초입에 누워있다. 4·3 정명이 정립되면 백비에 새기고 세울 예정이다.
- 2025년 제주 4.3 평화문학상 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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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당선 소감]
사람 목숨의 무게가 다르지 않은 세상이 펼쳐지길 소망해 봅니다!
사유하고 쓰는 일은 존재하는 인간에게 있어 귀하고 가치로운 일일 것입니다. 그 일을 행하고 사는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사람의 내면과 내면을 이어주는 일을 하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말로도 규정할 수 없는 말이 있다는 것을 절감하기도 합니다.
여행자에게 더없이 아름답던 섬으로만 생각했던 제주는 4·3을 깊이 알고 난 후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붉은 쓰라림의 이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은 죄도 없이 무고하게 죽어가야 했던 사람들 앞에서, 억울한 죽음에도 속울음 삼키며 침묵 가운데 살아야 했던 사람들 앞에서,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이별이 되지 않는 죽음 앞에서 언어마저 무력해지고 마는 순간을 맞곤 했습니다.
누워있는 백비에는 그러한 이들이 써 내려간 흰 문장이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한참을 머물며 교열이 어긋난 행간을 더듬어 읽다 보면 뿌옇게 흐려지는 습기에 발목이 젖기도 했지요.
어제와 오늘이 맞물려 역사는 흘러가는 것처럼 죽은 자의 어제는 산자의 오늘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지요. 야만이 만연된 시대 시대마다 그래서 누군가는 옳다고 여기는 일에 곡기를 끊으며 그름에 대항하기도 하고 때로는 피를 흘리기도 합니다. 부디, 이 바람의 땅에 뿌려진 피 값이 헛되지 않아서 사람 목숨의 무게가 다르지 않은 세상이 펼쳐지길 소망해 봅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의미 있고 귀한 상을 제정하신 제주특별자치도와 4.3 평화재단에 그리고 부족한 사람의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선생님이 되어주시고 친구가 되어주신 많은 시인들과 가족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며 내 작은 신음에 늘 귀를 기울이시는 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심사평]
제13회 제4.3평화문학상 시 부문에 응모한 사람은 총 139명에 작품 수 1,390편이었다. 이 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 8명의 80편을 통해서 같은 거대한 역사 주제에 대응하는 시인의 시적 태도는 어떠한가를 여실하게 엿볼 수 있었다.
먼저 4.3 당시 희생자들에게 빙의되어 그 목불인견의 현장성을 살려내느라 혼신을 쏟아 붓는 시들이다. 물론 이런 시들은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을 취재했거나 신문 기사 등 그동안 조사되었던 관련 자료를 참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현장성을 살려낸다고 해도 소재 혹은 이미지의 사유화를 통한 시적 형상화에 미흡할 때 시는 결코 공감을 얻지 못한다.
다음으로 학계에서 어느 정도 정리된 4.3에 대한 거대 담론에 단순히 지적 이미지를 대입시키는 기계적인 시들이다. 시의 기능 가운데 인식적 충격이나 성찰의 진정성 등이 있다. 한데 이런 기계적인 시들이 특히 예술에서 요구되는 클리셰를 일거에 전복시키는 참신한 시각을 확보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시는 결코 당위적인 관념이 아니고 사실적 감각과 이에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구되는 예술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불운이나 당위에 매몰되기보다는 쩨와 현장을 투명하고 겸손하게 바라보며 그걸 오늘의 시작, 나아가 미래를 담보해낼 ‘오늘 너머의 시각’까지를 확보하여 대상에 대한 시적, 감각적 해석을 탁월하게 해내는 경우이다. 천근만근 같은 쩨의 무거움을 ‘잘 빚은 항아리(엘리어트)’로 승화시켜내는 일은 고도의 정신력 없이는 불가능할 터 심사위원들은 여기에 부합하는 두 분의 시를 찾아냈다.
그중 한 분은 <백야> 등 10편을 응모한 분의 시이다. 이 분은 4.3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세련된 이미지와 시적 전망을 통해 4.3에 대한 미래적 시각까지 담보해내고 있다는 한 심사위원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이미지, 은유화 속에 역사 주제에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사실적 감각이나 주제 의식이 너무 은폐되어버린다는 약점이 나머지 두 심사위원의 확실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시인의 시적 가능성은 누구 못지않게 크다고 말할 수 있는데, 시를 요리하는 솜씨가 너무도 세련됐다는 데 심사위원들은 동의했다.
다음으로 <숨결> 등 10편을 응모한 분은 대상에 대한 시적 장악력이 뛰어났다. 특히 그의 소재에 대한 폐부를 찌르는 감각적 해석력은 무거운 주제를 순식간에 잘 빚은 감동의 항아리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가령 ‘백비’를 노래한 <흰 문장>에서 “아버지가 생략된 봄은 언제나 바깥이다”랄지, <감자꽃>에서 “뭉개진 가슴 속에서 푸른 독을 품은 꽃눈이 돋았다.” 그리고 ‘비설’을 읊은 <숨결>에서 “돌 속에 갇힌 울음”을 받아내는 시인의 어미 같은 마음은 거의 필사적이다. 그 외에도 <폭포>, <빌레못에서> 보여주는 시적 전개의 활달함과 아물러 사실과 은유의 조화로운 매칭, 소재와 주제에 대한 감각적이고 심도 깊은 해석력 등으로 4.3의 진실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와 인권을 수렴하는 상의 의의에 충분히 값해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심사위원 : 강형철, 고재종, 김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