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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영 Oct 30. 2022

사랑의 기준

로스앤젤레스 6

  돌아보면 첫사랑 이후로 이별 때문에 그렇게 크게 슬펐던 적이 없었다. 시작과 동시에 끝이 그려지는 연애를 했었고, 심지어 그 끝은 언제쯤, 어떤 이유 때문이겠지, 짐작이라고 착각했던 내 계획은 생각보다 또 구체적이었다. 시작하면서 끝을 계획하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지만 난 안심하고 만날 수 있었다. 시작에는 끝이 함께 따른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한정된 마음으로만 연애를 하려고 했다. 애초에 마음을 진심으로 열지 않았으므로 이런 계산이 가능했던 일이다.


  사람을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들을 한다. 그 마음을 열고 하는 과정에 서로를 궁금해하고 자신 또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하는 일, 관심사, 즐기는 취미, 친한 친구와의 관계,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추억, 더 나아가게 되면 내 어릴 적 이야기, 가족 이야기가 있겠지만 결국 그 이야기들은 다 그 사람의 과거나 현재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이다. 어떠한 사람들은 가족 이야기하는 게 어려울 수 있겠지만 난 오히려 그게 더 쉬웠고, 난 미래에 관한 이야기 하기를 꺼려했었다. 미래에 관한 이야기에는 내 소망과 신념, 꿈에 대한 것들이 있으니까.


  지금 돌아보면 이별이 안 슬펐던 친구들은 사실 뭘 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건 나에겐 그 흔한 “사랑해”라는 말 듣는 것보다 더 큰 일이었기에 물어보지도 않았던 거다. 먼저 들려주고 나에게 되려 묻더라도 난 패션 매거진 들어갈 거야,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알지? 그렇게 되는 게 내 꿈이야, 라는 그 자체로 멋있어 보이고 조금은 과장된 말들을 하곤 했었다. 더 깊이 들어가지 않을 수 있는 얘기들만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한 사람을 여러 방면으로 설명해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었기에 듣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에 대한 사람에 대하여 큰 부분을 보여주는 게 불편했고 입 밖으로 내뱉을수록 내 아킬레스건을 내보이는 일이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행복해야 하는 감정인데 나에겐 무서운 감정이었던 거다.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이 내 속도 모르고 커질 때면 두려움이 같이 커졌고, 상처 받을까봐 난 마음을 그때부터 닫기 시작했다. 상대방은 내가 쌓아 올리는 벽에 또 다쳤고 그렇게 겁이 나서 급히 끝내버린 관계들이 많았다. 결국 관계의 시작은 내 마음을 서서히 정리하는 시간과도 같았다. 사랑할 줄도 모르고 받을 줄은 더 몰랐다. 사랑에 대한 기준이 없었다.

  그런 방어와 계산을 다 제치고 나를 보여주고 싶어지는 일이 생긴 거다. 내 꿈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원한다면 그 어떤 이야기도 다 들려주고 싶었다.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이야기하면서 그 미래에 그가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 삶에 들어와 일부가 돼도 좋겠다가 아니라, 일부가 되면 좋겠다가 강했다. 그런 마음이 커질수록 역시 난 또, 두려움이 같이 커지는 천성 때문에 그 사람 앞에서는 작아졌다. 서로 나눈 이야기가 있으니 잘하고 싶었고, 보여주고 싶었고,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언제 한번 같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밤공기를 맞으며 같이 걸은 날이 있다. 그날 밤 홍대입구역에서 합정역까지 걸어가면서 별거 아닌 얘기에 난 또 작아졌다. 그저 영화를 본 소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데 난 내 의견을 말하지 못하더라. 그때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서면서 난 다짐했었다. 당분간 연락도 안 하고, 만나지도 않기로. 이전에는 나 자신에게 당당하다 못해 내가 자주 더 잘난 사람이었고 아까운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 앞에서는 항상 내가 부족한 거 같고 점점 작아지는 게 싫었다. 한없이 작게 느껴지는 내가 너무 초라했고, 그 초라함을 상대방도 느낄 거 같아서 난 잠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나 스스로 당당한 사람, 멋있는 사람이 돼서 다시 만나자 다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좋은 사람. 나는 그냥 나대로 살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고 사랑의 기준이 생긴 계기가 됐다. 내가 작아지는 건 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기 때문이었고, 날 알아주는 건 그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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