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사이지만, 가방 좀 털겠소.

고양이가 가자미 눈을 뜬다면... 꼼짝마라냥!

by 할망

SNS에서 우연히 마주한 한 장의 사진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분홍빛 노을이 퍼져가는 하늘 아래, 유유히 걸어오는 고양이들의 모습. 그 장면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 장소로 달려가고 싶어졌다. 늘 경계심 많은 동네 고양이들과는 달리, 사람을 향해 당당히 걸어오는 그들의 모습은 내게 큰 영감을 안겨주었다.


며칠 전, 히끄를 만나러 제주에 도착했을 때도 그랬다. 민박집 도련님으로 만난 히끄는 상상한 그대로의 시크한 매력을 풍겼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설렘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오조리 민박집 도련님, 히끄

그래서였을까. 다시 본 그 사진 속 고양이들은 내 안의 그리움을 더 짙게 자극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폭풍우가 몰아쳤고, 사진 속 고양이들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이어진 궂은 날씨가 개자, 나는 망설임 없이 내비게이션에 방파제 주소를 입력했다. 원래 들르려 했던 장소는 뒤로 미루고, 마음이 먼저 향한 곳으로 향했다.


오후 1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그 시간의 방파제는 놀랍도록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사람도 고양이도 한낮의 나른함에 잠긴 듯 보였다. 고양이들은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를 기대가 발걸음을 이끌었다. 방파제 입구에 차를 세우려던 찰나, 저 멀리 하얀 실루엣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고양이였다. 망설일 틈도 없이 가방을 메고 방파제로 달려갔다.

평소 같았다면 그늘 아래에서 잠들었을 시간. 그런데 그늘 하나 없는 방파제 위, 햇볕이 작열하는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잠든 하얀 고양이.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눈은 감은 채 코만 ‘킁킁’ 움직이며 내 냄새를 맡았다. 그 순간 나는 전혀 몰랐다. 이 고양이가 시력을 잃은 어미라는 사실을.

눈 감은 채 냄새로 세상을 읽는 어미 고양이


고개를 돌리자, 젖소 무늬, 얼룩 무늬, 치즈 무늬의 작고 귀여운 고양이들이 하나둘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왜 낯선 사람한테 다가오는 거냥? 배가 고픈 거냐옹?”
“가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먹을 거 좀 꺼내주라옹!”


사람이 반가웠던 걸까? 고양이들의 마중이 설레면서도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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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들의 마중. 기대와 설렘이 발끝마다 묻어난다.


장마처럼 이어졌던 비로 사람 발길이 끊긴 방파제. 그런 곳에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가방을 멘 낯선 사람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재빠르게 가방을 열고 사료와 닭고기를 꺼냈다.

처음엔 네 마리였다. 고루 나눠 담아 식사를 준비하자, 아이들은 밥그릇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런데 ‘이야옹~’ 한 마리가 울자, 어디선가 숨은 아이들이 속속 나타나 ‘야옹~’ 화음을 얹기 시작했다. 어느새 열 마리. 요정이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야옹—’ 부르자 하나둘 모여드는 방파제의 아이들.


순식간에 열 마리에게 포위당한 나는 네 마리 분량으로 준비한 식량을 어떻게 나눌지 고민에 빠졌다. 먼저 온 서열 높은 아이들이 습식을 먼저 차지했고, 한입에 꿀꺽. 먹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닭고기를 찢고 있는데, 이미 먹은 아이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어린 고양이가 조심스레 다가오려 하면, 서열 높은 고양이의 ‘하악!’ 소리에 물러난다. "줄 서라옹! 사이좋게 먹어야지!" 소리쳐도 질서는 없었다. 거리를 두고 놔줘도, 낮은 순위의 아이들은 끝내 입도 대지 못했다.


그때, 다섯 달쯤 되어 보이는 카오스 무늬 고양이가 하얀 고양이에게 다가가 젖을 빨기 시작했다. 곧 고등어 무늬 고양이도 옆에 붙었다. 이미 젖을 뗄 시기일 텐데… 이 아이들이 그녀의 새끼였구나.

시력을 잃은 어미가 이런 환경에서 새끼들을 지키며 젖을 먹이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눈먼 어미의 품에서, 평온하게 젖을 먹는 아이들


어미 고양이에게는 ‘마따따비’라는 작은 선물을 주었다. 냄새를 맡고는 “이게 뭐냐옹?” 하는 표정으로 툭툭 치더니, 이내 누워서 물고, 빨고, 뒹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힘든 육묘의 시간을 잠시나마 잊었기를 바랐다.

마따따비 향을 맡으며 육묘 스트레스 날려요.


그 사이 꼬마 고양이들은 내 짐을 뒤지기 위해 엎치락뒤치락 난리였다. "얘들아, 이미 다 털렸다옹! 까까는 없다냥!"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방 하나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귀엽고도 안쓰러웠다.


가방 위에 올라탄 채 햇살을 즐기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쪼그려 앉았다. 그제야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보려는 찰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가방 털이 현장, 바쁜 발과 분주한 코끝
이 가방은 우리 거라옹. 가져가기만 해보라옹!


꼬맹이들이 하나둘 내 주위로 다가오더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내 그림자를 그늘 삼아 누워버린 것이다.

잠시 당황했지만, ‘이 정도 인기를 누릴 기회도 드물지!’ 싶어 엉덩이를 조심스레 바닥에 붙였다. 그늘이라도 되어주자는 마음이었다. 도망칠 줄 알았던 아이들은 오히려 자세를 고쳐 눕는다. 다리 아래에 자리를 잡은 삼색이, 엉덩이에 바짝 붙은 고등어 무늬 두 마리와 젖소 고양이, 오른쪽에는 치즈 고양이까지 기대어 눕는다. 가방 위에 있던 꼬맹이들까지 슬그머니 다가와 함께 다리를 뻗고 잠시 누워 있었다.


그 평화롭고 따뜻한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그늘막이 되었다.

꼬맹이들의 배를 다 채워주지 못했으니, ‘그늘이라도 되어주자’는 심정으로 앉았던 바닥은 어느새 점점 딱딱하게 느껴졌고, 땀은 줄줄 흘러내렸다.

조심스레 다가와 마음을 연, 작은 생명들


햇살은 따갑게 내리쬐고, 나는 반바지를 입은 채 고양이들 체온까지 더한 열기에 푹 익어갔다. 마치 에어프라이어에 들어간 기분. 참다 못해 자세를 바꾸려 하자, 아이들이 단체로 가자미 눈을 뜨고 날 노려본다. 그중 한 꼬맹이는 도끼눈까지 떴다.

그늘 각도 맞춰 누운 거라옹. 꼼짝 마라냥!


슬쩍 기대어 있던 아이를 밀어봤다. 놀라는가 싶더니, 꼬리를 ‘툭툭’ 치며 감정 표현을 한다.

“하악~ 움직이지 마라옹. 내 몸에 손대지 마라냥.”

보통은 도망갈 만한 상황인데, 이 아이는 다시 제 자리에 살을 붙이고 눕는다. 아주 만만하게 본 모양이다. ‘간식을 준 사람은 해롭지 않다’는 믿음이 생긴 걸까.

“언니, 너무 뜨겁다냥!” 속으로 하소연을 해도, 고양이들은 무표정하게 그림자 안에서 낮잠에 빠진다.


그래, 좋다. 언니가 홍당무가 되더라도, 너희 그늘이 되어줄게. 쉬고 싶은 만큼 자고 가라. 그런데… 내 다리에 난 쥐는 너희가 좀 잡아줄 수 없겠니?

우리 또 만나자옹. 당당함을 잊지 마라냥!


아이들과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했을 때, 고양이들은 하나둘 바위 아래로 내려갔다. 어떤 아이는 바위틈으로 사라졌고, 어떤 아이는 고개만 빼꼼 내민 채, 혹시 더 줄 게 남았는지 나를 바라보았다. 시야가 흐린 흰색 어미 고양이도 바위틈 어딘가에서 고개를 내밀고, 조심스레 냄새를 맡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바람은 조용히 흘렀고, 그 순간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이 바위틈과 파도 소리 가득한 이곳이, 아이들의 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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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아래, 고양이들의 진짜 집


방파제 고양이들과의 첫 만남은 생각보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그림자에 기대는 그 천진한 태도. 제주 섬의 자연과 어우러진 이 아이들의 자유로운 모습은 그야말로 동화 같았다.

물론, 거센 바람과 파도,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이 그들의 삶을 얼마나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지. 그건 이 따뜻한 풍경 뒤편에 감춰진 또 다른 이야기였다.


*마따따비 : 개다래나무의 가지 부분. 캣닢과 비슷하게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향을 가지고 있어 진정과 기분전환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네이버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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