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손님이 남긴 자리에서, 조용히 기다립니다.
지난 여름, 나는 고양이들과의 첫 인연을 따라 이 고양이 성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1부 <계단 위의 오아시스> 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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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끝, 초록 기와지붕 아래. 고양이들이 머물다 가는 식당이 있다. 햇살이 머무는 돌담 옆으로 조심스럽게 올라오는 발걸음들. 그곳은 고양이들이 망설임 끝에 발을 들이는 작은 성처럼 느껴졌다.
제주에 갈 때면 마음이 먼저 향하는 곳.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을 때면, 그곳의 고양이들과 마델이를 떠올리며 나는 다시 그 계단을 찾는다. 익숙해진 얼굴들과 이름들이, 어느새 나의 이야기 속에도 스며들고 있다.
그곳에 머무는 고양이들 가운데서도, 오스칼의 아들 마델이는 유독 눈길을 끌었다. 베레모를 눌러쓴 듯한 일자 앞머리, 둥글둥글한 볼, 퉁명스럽지만 어딘지 정든 눈빛. 그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간식을 기다릴 때마다 지어 보이던 무심한 얼굴에는, 보는 이의 마음을 조용히 녹이는 묘한 힘이 있었다.
여왕님이라 불리던 오스칼의 기품이 그에게도 조금은 스며들었을까. 나는 어느새, 이 작은 고양이에게 ‘왕자님’이라는 애칭을 붙이게 되었다. 이름과 표정은 조금 엇갈렸지만, 간식을 기다릴 때마다 짓는 무심한 얼굴에는 사람 마음을 조용히 녹여내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를 보고 싶어 시간을 맞춰 식당을 찾은 날, 마델이는 식당 옆 귤밭 그늘에서 조용히 쉬고 있었다.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풍경 속에서 다른 고양이들도 엎치락뒤치락 장난을 치며 어울려 놀고 있었다. 풀잎 사이로 튀어 오르는 꼬리, 흙바닥을 굴러다니는 몸짓까지. 그 자체로 작은 축제 같았다.
“왕자님, 간식 누나 왔다옹. 어서 와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든 마델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돌담 위로 점프해 올라온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친구 고양이 둘이 뒤따랐고, 건물 뒤편에 숨어 있던 고양이들까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까지만 해도 세 마리에 불과하던 고양이들이, 어느새 여섯으로 늘어나 있었다.
마델이는 앞장서 계단을 오르며 나를 이끌었고, 나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테라스에 도착하자 그는 "간식을 차려보라냥"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는 참지 못하고 먼저 내려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지만, 그저 같은 자리에 머무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마음이 오갔다.
마델이 곁에는 늘 함께 어슬렁거리는 친구, 코에 점이 있는 젖소 고양이 ‘깜코’가 있었다. 둘은 테라스를 중심으로 종종 짝처럼 붙어 다녔고, 어느새 그 모습이 익숙해졌다.
고양이들도 마을마다 옷차림이 다르다. 그 무늬와 빛깔이 마치 땅과 바람, 햇살의 결을 닮은 듯하다. 평대리에선 흑백의 고양이들이 많다. 마델이도, 깜코도 정갈한 흑백 털을 입고, 조용한 해안 마을 풍경 속에 자연스레 스며든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의 일부였던 것처럼, 나란히 걷는 두 고양이는 하나의 장면을 완성한다. 왕자님을 따르듯 한결같이 옆에 있는 깜코는, 그 풍경에 믿음직한 그림자를 더해준다.
계단 아래쪽에서도 또 다른 움직임이 일었다. 맛있는 냄새나는 누나가 올라간 걸 본 고양이들이, 하나둘씩 계단을 향해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간식 가방을 내려놓으라옹!” 하는 듯한 눈빛이 반짝였다.
단체로 펼쳐진 귀여운 시위 앞에서 웃음을 참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가방에서 풍겨 나오는 유혹에 이끌려, 고양이들은 발끝까지 집중한 눈빛을 보냈다.
“간식은 언제 나오냐옹?”
그 무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사장님의 허락을 받아 작은 파티가 열렸다.
이제 이곳은 고양이 손님들이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익숙한 일상의 한 풍경이 되었다.
처음엔 한두 마리로 시작했던 고양이 식당은, 어느 날부터 다섯 마리의 고정 손님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계단을 오르던 그 작은 무리는 이내 단골이 되었고, 어느 날은 사람보다 고양이 손님이 더 많았다. 사장님이 신청해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도 스무 마리가 넘는다. 배가 고파 들렀다가 한 끼만 겨우 먹고 돌아서는 고양이들도 있지만, 그 무리 속에 들어가 밥식구가 된 고양이들도 있다.
다쳐서 온 고양이들은 약을 먹이며 회복을 도왔고, 그렇게 쌓인 시간이 어느덧 5년. 지금은 열 마리가 넘는 고양이들이 이곳을 오간다. 사장님은 이제 동네 고양이들의 든든한 지원군, 베테랑 집사가 되셨다. 이름을 지어준 고양이만 해도 야누스, 오스칼, 매니매니, 깜코, 마델, 프리다, 꼬마, 땡글, 애기, 코난, 알록이, 바니, 짱이, 랑이, 보리, 돌담, 밭담, 리태, 한결, 구월이, 코점… 어느새 20마리를 훌쩍 넘는다.
사장님이 운영하는 인스타그램 하이라이트 ‘길냥이급식소’에는 고양이들의 안부가 작은 일기처럼 쌓여 있다. 제주에 머물 수 없을 때면, 나도 모르게 와이파이를 켜고 그 기록을 들여다본다. 계단을 오르내리던 발자국 소리와 낮은 울음이 그리운 날이면,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고양이들의 하루가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그러다 보면, 자주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바로 검은 무늬 아래 맑은 눈빛을 지닌 마델이다. 어릴 적부터 테라스를 조심스럽게 어슬렁거리던 그 아이는, 어느 날 목에 플라스틱 고리를 걸고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멀리서 소식만 기다리던 우리는, 나흘 뒤 스스로 고리를 빼고 멀쩡히 돌아온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비록 직접 돌보는 고양이는 아니지만, 마음을 나눈 친구들의 안부에 울고 웃는 날들이 쌓여갔다. 이 식당은 그렇게 나에게도 ‘계단 위의 오아시스’가 되었다.
사장님이 지어준 이름으로 하나둘 기억하게 된 친구들은 스무 마리가 훌쩍 넘었다. 그중엔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얼굴들도 있다. 마델이도 그랬다. 지난겨울 무렵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인근 상점과 이웃들에게도 알리고 조심스레 찾아 나섰다.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오래 소식을 듣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질수록 마델이를 향한 마음 한켠이 시렸다.
그 마음은 여전히 고양이 식당 어딘가에 고요히 남아 있다. 그리고 오늘도, 누군가 그 계단을 다시 오르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곳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 이 이야기는 제주 평대리에 있는 ‘밥 짓는 시간’을 배경으로 쓰였습니다. 고양이 손님들과 식당지기의 따뜻한 일상은 인스타그램 @bobttae 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