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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복치 Oct 13. 2022

인생을 걸 만한 유치한 것들에 대하여, <싱 스트리트>

행다의 엔딩크레딧

*이 글은 독립 음악 매거진 프로젝트 gem의 <행다의 엔딩크레딧> 코너를 발췌한 글입니다.

*곡 명(하이퍼링크)을 클릭하시면 유튜브에서 음악을 들어볼 수 있어요.



인생을 걸 만한 유치한 것들에 대하여, <싱 스트리트> 



싱스트리트 스틸컷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있으신가요? 유사한 증상으로는 첫째,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어딘가 허전한 기분을 떨칠 수 없다거나, 둘째, 크게 불행하지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다거나, 셋째, 언젠가는 분명 살아있다는 기분이었는데 그 기분이 생생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든가 등등이 있습니다. 위의 증상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분명 내일이 기대되는 때가 있었고, 무언가에 열정을 쏟고 그만큼 상처받기를 반복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때의 스스로가 낯설 지경이에요. 대체 난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를 한동안 고민하다 의외의 곳에서 해답을 찾았습니다. 바로 로맨스 영화에서요.


로맨스 드라마, 예능, 영화를 국적 불문하고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뻔히 닥쳐올 시련에 맨몸으로 맞서는 주인공들이 미련하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극적인 연출을 위해 억지스러운 요소가 가미된 탓도 있겠지만 사랑, 우정, 평화 등을 위해 인생을 거는 선택을 하는 것이 무모해 보였어요. ‘그래, 너희는 주인공이니까 어려울 때 조력자가 나타나고,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고, 절대 실패로 끝날 일은 없으니까 그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 순간 로맨스를 멀리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로맨스 영화와 함께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일은 <싱 스트리트>를 보며 대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짐작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싱 스트리트> 역시 OST가 좋은 로맨스 영화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보다 다채로운 음악을 소개할 수 있는 영화를 선택하고 싶다는 이유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OST를 여러 번 듣긴 했어도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돌려 본 적은 없었어요. <싱 스트리트>를 뜯어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내키는 일은 아니었는데, 부끄럽지만 음악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 배우들의 연기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카페에서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지 못했답니다...



<싱 스트리트>는 <원스>, <비긴 어게인>으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존 카니 감독의 음악(이라 쓰고 로맨스라 읽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코너가 운명적인 사랑 라피나를 만나 그녀를 사로잡기 위해 밴드를 결성하고, 음악을 만들고, 꿈을 찾아 떠나는 내용이지요. <싱 스트리트>의 배경은 1980년대의 아일랜드입니다. 존 카니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80년대 제2차 브리티쉬 인베이전 무렵의 영국 뉴웨이브, 신스팝, 고딕 록 등을 대표하는 뮤지션들의 음악, 그리고 그들의 음악을 훌륭하게 재해석한 OST, 1980년대 당시 아일랜드의 사회문제들이 어우러져요. 영화에 아주 촘촘하게 등장하는 당대의 음악과 OST가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을 절묘하게 설명하고, 그들의 심리를 대변한다는 점이 가장 흥미롭습니다.



Motorhead의 ‘Stay clean’(1981, 영국) 


주인공 코너는 1980년대 일자리를 찾아 영국으로 떠나는 아일랜드 청년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코너는 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해 다른 지역의 가톨릭 학교로 전학을 가지요. 경제적인 이유로 학업을 포기한 형,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민 행렬을 보도하는 뉴스 방송 등에서 당시 아일랜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코너가 전학 첫날 등교하는 장면에서 Motorhead의 ‘Stay clean’이 흘러나와요. 눈을 마주치면 언제 주먹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학생들의 모습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을 제외한 단 하나의 색깔도 용납하지 않는 교복, 학생을 아무렇지 않게 구타하는 선생님까지. 이런 엉망진창인 상황을 ‘깨끗이 받아들이라’는 가사가 화면에 떠오르며 코너의 학교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을 암시하죠. 존 카니 감독은 실제로 코너와 비슷한 고등학교에서 학창시절을 지내며 밴드를 결성한 경험이 있다고 해요.




 Duran Duran의 ‘Rio’(1982, 영국)


 Sing Street의 ‘Riddle of model’


핵매운맛의 학교생활을 이어가던 코너는 골목길에서 신비롭고 아름다운 소녀 라피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위해 자신이 밴드를 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죠. 음악을 좋아하는 형이 Duran Duran의 ‘Rio’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며 “최고의 베이시스트는 존 테일러다. 비틀즈의 시대는 지났다. 듀란 듀란은 천재다. 음악과 시각적 요소가 어우러져야 한다. 이제는 뮤직비디오의 시대다”라고 세뇌하듯 말했던 것을 기억했는지, 그녀가 모델이라는 말을 듣고는 있지도 않은 밴드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는 급하게 팀원들을 모집해 ‘Sing Street’(싱 스트리트)라는 밴드를 결성하지요.


“미래파 밴드를 모집합니다”라는 밴드 모집 공고에서 미래적인 것,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당시 음악의 흐름을 엿볼 수 있어요. 1980년대 당시 펑크 록에 영향을 받은 영국의 뉴웨이브 아티스트들은 펑크, 디스코, 신스팝, 고딕 록 등 다양한 장르와 접목을 시도하며 미래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답니다. Duran Duran(듀란 듀란)은 영국의 뉴웨이브 신스팝을 대표하는 그룹이에요.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는 Depeche Mode(디페쉬 모드), Joy Division(조이 디비전) 역시 영국의 뉴웨이브, 포스트 펑크를 빛낸 제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제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뭐인지 궁금하다면, gem 5호 '음대생 엄지의 장르 연구실'을 참고하세요)의 주역이랍니다. 영화에서 코너는 스스로 Futurist(미래주의자)라고 말하기도 해요. ‘Riddle of model’(모델의 수수께끼)는 라피나를 보며 느낀 알 수 없는 감정들을 표현한 싱 스트리트의 첫 번째 곡이에요.



Sing Street의 ‘Up’


She’s running magical circles around my head


그녀가 내 머리 주위에 마법의 원을 그리면


I head to ride on a dream she’s driving


난 그녀가 운전하는 꿈이란 차를 타고


She turns to kiss me


그녀의 키스와 함께 깊은 잠에 빠지네




코너는 라피나에게 점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해요. 그녀와 함께 하는 상상을 하며 ‘Up’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보내줍니다. 하늘을 뚫는 코너의 목소리와 명랑한 멜로디가 어우러져 노래에 공기 방울이 달려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줘요. 라피나만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는 코너의 마음이 가사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코너의 마음과는 다르게, 라피나는 모델이라는 꿈을 위해 남자친구와 함께 런던으로 떠날 것을 다짐하죠.





The cure의 ‘In Between days’(1985, 영국)


라피나와 결혼까지 생각했던 코너는 상실감에 빠집니다. 그런 코너를 보고 형은 남의 노래(듀란 듀란) 흉내만 내는데 어떻게 라피나를 꼬시겠냐는 일침을 날리죠. “모델이 꿈이라니 허세 아니야?”라고 질문하는 여동생에게는 “꿈을 좇는 게 허세야? 제대로 된 꿈이라는 게 뭔데? 택시 기사, 청소부, 시인, 가수, 화가 무엇이든 꿈꿀 수 있어”라는 말로 응수합니다. 코너는 징글징글한 현실과 꿈 사이의 간극을 행복한 슬픔이라고 표현해요. 그리고는 자기다운 길을 걸어갈 것을 선포합니다. 행복한 슬픔이 무엇이냐 묻는 친구에게 코너는 “내가 비록 이 촌구석에서 너네랑 밴드를 하지만 버텨낼 거라는 뜻이야. 현실을 인정하려 애쓰면서 예술로 승화시킬 거야”라고 대답합니다. The cure의 ‘In Between days’에서는 이러한 코너의 심경 변화를 느낄 수 있어요. ‘계속 나아가 그냥 걸어가 계속 나아가 네 선택이잖아’라는 가사가 코너의 심정 그대로를 대변하는 듯합니다. The cure 역시 1978년 결성된 영국의 밴드로, 80년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해요. 이들의 포스트 펑크 음악은 후의 고딕 록에 큰 영향을 줍니다.




 Sing Street의 ‘A beautiful sea’


 Spandau Ballet의 ‘Gold’(1983, 영국)


코너는 라피나와 바다를 보며 느낀 감정을 담아 처음으로 자신의 개성을 살린 노래를 작곡해요. 이렇게 탄생한 ‘A beautiful Sea’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코너와 라피나가 꿈을 찾아 바다를 건너는 장면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자신의 개성, 자신의 음악을 찾아가는 이 시기의 코너는 스타일에도 변화를 줍니다. TV에 나오는 뮤지션들의 화려한 화장, 반짝거리는 의상들을 따라 하다가 돌연 롱코트를 입은 신사의 모습으로 등장하죠. 이때 나오는 곡이 바로 Spandau Ballet의 ‘Gold’입니다. 이전의 음악들과 달리 007이 생각나는 점잖고 세련된 노래예요. 실제로 ‘Gold’는 발매 당시 L.A.올림픽의 찬가처럼 사용되며 영국, 미국 등지에서 큰 사랑을 받았답니다.



Sing Street의 ‘Drive like it stolen’


한편 런던으로 떠난 줄만 알았던 라피나는 남자친구의 배신으로 런던에서 돌아옵니다. 학기 말 디스코파티를 앞두고 무대를 준비 중이던 코너는 라피나와 함께 손을 잡고 런던으로 도망치는 상상을 하며 노래를 불러요. ‘Drive like it stolen’은 라피나와 함께 꿈을 찾아 런던으로 달리고 싶다는 코너의 마음을 담은 곡입니다. 존재감 강한 신디사이저 소리와 빠른 비트, 반항미 가득한 코너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답답한 현실을 박차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M의 ‘Pop Muzik’(1979, 영국)


 Sing Street의 ‘Girls’


본격적으로 디스코파티가 시작되며 M의 ‘Pop Muzik’이 흘러나와요. ‘Pop pop pop music’이라는 한 소절만 듣고도 ‘이것이 디스코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롤러장 세대는 아니지만 롤러장에서 나올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디스코파티가 시작되고, 코너는 마지막 무대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억압했던 학교, 선생님들에게 돌직구를 날립니다. ‘Girls’의 ‘우린 모두 진흙더미 속 다이아몬드, 날 오랫동안 쳐다봐 널 사랑하는 사람을 보게 될 거야’라는 가사는 디스코파티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요. 학교의 폭군이었던 선생님은 학생들의 기세에 눌려 파티장을 떠나죠.


이윽고 극적으로 재회한 코너와 라피나는 함께 런던으로 떠날 채비를 합니다. 형의 도움을 받아 배편을 구하고, 일렁이는 파도에 맞서 라피나와 함께 배에 몸을 실어요. <싱 스트리트>를 떠올리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장면이지요. 거센 파도에 굴하지 않고 꿈과 사랑을 찾아 떠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이 당시 새로운 열풍을 일으켰던 뉴웨이브 음악들과 어우러져 더욱 큰 감동을 줍니다.


1980년대 영국 뉴웨이브에 진심이었던 존 카니 감독의 치밀한 선곡, 당시 음악의 흐름과 맞아떨어지는 주인공들의 도전과 성장,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사랑, 열정, 우정, 희망, 평화 등에 몸을 던지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이런 영화를 만들게 했을지, 무엇이 이런 노래를 만들게 했을지 곱씹어보았어요. 어쩌면 제가 로맨스 영화와 함께 잃어버렸던 것은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삶의 대부분을 지탱하는 가치, 개성, 내일에 대한 희망과 열정 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들은 지극히 사소하고 유치한 것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생을 거는 일, 가슴이 뛰는 꿈에 인생을 거는 일 등이 생존이 걸려 있는 현실 앞에서 한없이 무모하거나 유치하게 느껴질 때가 왕왕 있지만, 어딘가 허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주기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싱 스트리트>와 함께 마음속에 인생을 걸 만한 유치한 것들 한두 가지 정도 품고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추신. 단지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고 즐길 뿐 전공자가 아니기에 다소 허술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여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셨다면 언제든 댓글로 피드백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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