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스케일링

2024.10.10 목요일의 기록

by 허건

드디어 치과에 갔다. 막연한 두려움과 가지 않아서 느끼던 자기혐오가 오늘에서야 해소된 느낌. 두렵고 피하고 싶을 땐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된다.

이어폰을 꽂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으며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퇴근길 동안 듣는 라흐마니노프와 말러의 선율이라니. 한 번 빠진 노래는 지겹도록 듣는다. 웅장한 선율과 함께 잠시 현실을 벗어난다. 그러다 어느새 집에 도착하니 7시 20분. 치과 예약은 8시였으니 시간이 좀 남는다. 집에서 양치를 하기로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치과를 가기 전엔 꼭 양치질을 해야 한다.


두려움 반, 걱정 반으로 집 앞 치과에 갔다. 두려움을 잊으려 고객 대기실에 설치된 커피 머신을 분석한다. 간호사가 예쁘다. 아무 걱정 없는 듯 태연한 척한다. 치과 의자는 언제나 무섭다. 누워서 입을 벌린 채 녹색 천으로 얼굴을 가리면 세상에서 가장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 울어도 손 잡아줄 엄마도 없다. 성인답게 홀로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내 증상과 원하는 치료법을 설명한 뒤 스케일링을 받기 시작했다. 치위생사가 집도하는 스케일링. 5년 만의 스케일링이어서 그런지 정말 무자비하게도 쑤신다. 별도의 치료를 받은 게 아니기에 여타 국소마취도 없이 그야말로 쌩니를 무자비하게 긁고 쑤신다. 프라그가 많이 낀 아랫니 뒷부분을 가장 공들여서 쑤신다. 어떤 부분은 다소 아프고, 어떤 부분은 다소 시리다. 다소라 표현할 만큼 아픔은 참을만했다. 그저 손을 꼭 쥐고 있었을 뿐. 이빨 사이를 쑤시고 어금니 뿌리를 건드릴 때 느껴지는 이 묘한 불쾌감. 다시 겪고 싶지는 않은 경험이다.


스케일링을 끝마치고 침을 뱉으니 피범벅이다. 정말 무자비했구나. 물로 입을 헹구고 다시 뱉어 내길 수차례. 나는 이제 스케일링도 견뎌낸 의젓한 한 남자가 돼있었다.

내 사랑니의 형태는 오른쪽 아랫부분에 누워서 자라나고 있었다. 마치 융중의 초가집에서 누워있는 와룡 제갈량 마냥 사랑니는 앞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랑니 때문에 골치 아팠던 세월이 스쳐 지나간다. 이제는 참을 수 없다. 사랑니를 발치하기로 맘먹고 예약을 잡는다.

사랑니가 옆으로 자라 있지만 신경을 건드리고 있지는 않아 위험하지는 않다고 한다. 불행 중 참 다행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치과를 가는 날이 되니 사랑니가 아프지 않다. 그것도 참 다행이다. 이빨이 아팠을 때 스케일링을 받았으면 정말 죽음이었겠구나, 생각한다.

거사를 끝마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와 밀린 빨래를 개키고, 설거지를 하고, 목욕재계를 끝마쳤다. 아직 사랑니가 다 해결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스케일링을 받고 치과에 예약을 했으니 절반은 끝낸 셈이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끝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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