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4 목요일의 기록
차를 박았다. 교통 체증으로 인한 지각으로 마음이 급했다. 빨리 주차하려다 오른쪽 뒷 범퍼를 콘크리트 벽에 박은 것이다. 살면서 한 번도 주차하다 차를 박은 적은 없다. 심지어 이전에 타던 200만 원짜리 중고차를 몰 때도 한 번도 긁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출고된 지 3달도 안 된 신차를 박았냐 이 말이다.
쿵 소리와 함께 심장이 뚝 떨어졌다. 기어를 D에 놓고 살며시 앞으로 나와 차를 세우고는 조심스럽게 내려 오른쪽 뒷 범퍼를 확인했다. 아뿔싸. 뒷 범퍼에 시멘트 가루가 묻어 있다. 벽과 닿은 부분은 사포로 열심히 긁은 듯 도장이 다 벗겨져 있다. 충격이 꽤 컸는지 범퍼가 살짝 옆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시간이 단 10초 만이라도 되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백미러를 한 번만 더 볼 걸, 엑셀을 더 살살 밟을 걸…… 애지중지 손세차하고 아껴주던 녀석이었다. 사랑하던 애마는 주인 잘못 만난 죄로 출고 단 세 달 만에 헌 차가 됐다. 헌 차가 되니 애정도 식은 느낌. 뒷 범퍼를 볼 때마다 울화통이 치민다. 왜 내게 이런 일이. 후회해도 소용없다. 뒷 범퍼는 이미 많이 누추해져 있었다.
마음 고생한 지 2주가 지나고 결국 아는 사람을 통해 외형복원 집에서 40만 원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뒷 범퍼를 수리했다. 지출 계획에 없던 40만 원이 부주의한 후진 한방에 날아간 것이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마음고생을 하며 느낀 후회란 감정에 대한 고찰. 후회란 감정이 과연 쓸모가 있을까. 후회란 감정이 필요할까. 벌어진 일은 이미 벌어진 일. 후회와 걱정,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도움 되지 않는, 마음고생만 안겨주는 감정들. 유리 멘탈인 나에겐 특히 더 그렇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고, 걱정해 봐야 벌어질 일은 벌어지기 마련.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걱정하지 않기 위해 미래를 다짐한다. 그러나 언제나 실수하고 후회한다. 하기 싫은 일과 겪기 싫은 일을 걱정하며 스트레스에 휩싸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쓸모없는 감정은 없다는 생각. 후회의 이면에 성찰이 있고, 걱정의 이면에 대비가 있는 건 아닐까. 성찰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고, 대비하지 않으면 위기에 무너진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올 누군갈 위해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면 그건 후회와 걱정을 통해 얻은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찌질하게 사랑했던 순간들, 할 말도 못 하고 머뭇대던 순간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후회했던 순간들, 조급한 마음에 주차하다 박은 뒷 범퍼. 그 모든 게 나였다. 하나도 남김없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 서정주의 ‘자화상’의 한 구절이다. 나는 숱한 후회와 걱정의 순간들로 성장하였다. 이제 다시는 후진을 할 때 건방지게 백미러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엑셀부터 밟지는 않을 것이다. 볼 품 없던 뒷 범퍼가 외형복원이라는 매직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하듯, 볼 품 없던 내 자신이 후회와 걱정을 통해 변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