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7. 목요일의 기록
내 기억의 시작. 1998년쯤이었던 것 같다.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일어난 해. 그 시절 나는 대중목욕탕이 대통령 이름 때문에 대중인 줄 알았다. 대중교통도 마찬가지.
내 본적은 영등포구 신길동이다. 그러나 기억의 시작은 신길동에서 대방동으로 이사 갔을 무렵부터다. 몇 살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방동에서 처음 유치원에 갔던 기억은 난다. 어린 시절 또래 여자애보다 작았던 나는 나보다 덩치 큰 남자애한테 도시락으로 얼굴을 맞고, 펑펑 울며 집에 돌아와 며칠간 식음을 전폐한 적이 있다. 가족들의 걱정과 염려로 나는 다니던 유치원을 바꿨다. 바꾸기 전 유치원에서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도 못 하고 내내 꾹 참다가 결국 바지에 지리고 만 기억도 있다. 유치원을 바꾸기 전 기억은 내 유년의 윗목, 암울하고 지리멸렬한 시절이었다.
유치원을 조금 더 멀리 있는 곳으로 바꾼 이후에 나는 활기를 되찾은 것 같다. 그 시절 사진을 보면 제법 늠름하기까지 하다. 여타 원내 행사와 재롱잔치에 솔선수범 참여하고, 짝꿍의 손을 꼭 잡고 다니는 등 선생님 말을 잘 들었다.
1997과 1998, IMF로 인해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때문에 나는 항상 할머니와 같이 있었다. 내 기억의 시작엔 언제나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양치를 할 때 항상 혓바닥을 잘 닦아야 된다고 하며 양치질을 마친 내 혓바닥을 검사했다. 세수를 할 때 코를 푸는 법, 젓가락질하는 법, 이불을 개키는 법, 똥 싸고 휴지를 몇 번 감아서 엉덩이를 닦아야 하는지, 밤에 잠을 안 자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는 이야기, 문둥이 환자가 어린이를 잡아먹는 괴소문 등 할머니에게서 나는 인생사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
할머니와 함께 시장이나 동네 미용실에 갈 때도 나는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다녀야 했다. 할머니는 항상 손을 꼭 잡으라 했고, 말 안 들어서 다치면 너만 손해라고 했다. 그땐 손해가 무슨 말인지도 몰라서 그냥 안 좋은 건가 보다 했다.
그땐 할머니가 오토바이를 왜 오도바이라고 하는지, 토마토를 왜 도마도라고 하는지, 빠께스, 구루마, 스메끼리, 다마네기, 다라이, 단스 등 이해하지 못할 말투성이었다. 할머니는 항상 파란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라고 했는데, 신호등엔 초록색만 있지 파란색은 없다. 심지어 집에서 파란 다라이를 가져오라고 해서 진짜 파란 걸 가져왔다가 혼난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할머니가 내 얘기를 잘 못 알아듣는 경우가 더 많다.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야 할 때도 있다. 암만 설명해 줘도 할머니가 티비 리모컨의 외부입력 버튼을 잘못 누르는 날이면 그날은 할머니 하루 종일 티비 못 보는 날이다.
할머니와 어딘가를 갈 때도 나는 할머니 보고 손을 꼭 잡으라고 당부한다. 내 말 안 듣다가 다치면 할머니만 손해지 뭐.
한 25년이 지나니깐 서로의 역할이 바뀐 것 같다. 어린 나를 걱정하던 할머니와 늙은 할머니를 걱정하는 내가 있다.
나는 아직도 양치질을 할 때 혓바닥을 열심히 닦아서 할머니한테 칭찬받고 싶다. 이불은 개키기 싫지만 혼날까 봐 예쁘게 개킨다. 젓가락도 올바르게 잡고, 인사도 열심히 한다. 비싼 걸 사면 싸게 샀다고 거짓말하고, 어디를 다치면 할머니한테 약 발라달라고 한다.
어린 시절엔 할머니가 항상 무서웠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할머니와 보낸 어린 시절은 내 유년의 따뜻한 아랫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