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2024.11.20 수요일의 기록

by 허건

서른이 넘으니 한 명씩 떠나간다. 불알친구 한 명이 지난봄에 결혼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 중에 가장 첫 번째로 결혼한 친구. 그래서 친한 친구 둘과 함께 축의금에 너무 힘을 줬다. 첫 단추를 거창하게 끼웠으니, 앞으로 그 녀석들이 결혼할 때도 큰일 날 노릇이다.

벌써 내년에는 친구 둘이 결혼 예정이다. 나는 앞에서는 결혼에 관심 없는 듯 애써 미소 지으며 축하해도, 뒤에선 씁쓸한 고독을 씹는다. 여자친구란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지만 기왕이면 있어서 문제이고 싶다.


어릴 적엔 일찍 결혼하고 싶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안온한 삶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이루고, 자식을 낳아 그 누구보다 사랑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결혼에 가장 관심 없던 친구가 가장 먼저 결혼을 했다. 누구보다 결혼을 하고 싶었던 나는 아직 여자친구도 없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나오는 마법사의 돌처럼 결혼은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찾아오고, 원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오지 않는 걸까. 나는 내가 상상하던 행복한 삶의 모습이 있다. 그 삶이 충족될 수 없을 것 같으면, 이성과의 관계를 포기해 버렸다. 가치관의 문제, 종교의 문제, 성격의 문제, 한 마디로 말해 눈이 높은 것 같다.

서른이 넘고 적당한 경험이 쌓이니 이제 알겠다. 결혼은 내 판타지를 충족할 수단이 아니라, 치열한 현실이라는 걸. 이성은 원래 다른 행성에서 찾아온 이방인이라 영원히 같을 수 없다는 걸. 엄마와 아빠는 아직도 싸운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친구의 결혼식에 오랜만에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이제는 이런 날 아니면 이렇게 다 같이 모이기도 힘들다.

내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 네 명이 있다. 나는 그 네 명 이외의 사람을 친구라 부르지 않는다. 내게 친구란 말의 범위는 굉장히 좁고 기준이 엄격하다. 이와 비슷하게 내겐 친하다는 말의 기준도 엄격하다. 몇 번 웃으며 얘기했다고 나와 친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난 속으로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다. 내 기준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것이다.

내게 친구란 함께 목욕탕에 가거나, 우리 집에서 같이 잘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벌써 얼마 전에도 친구 한 명이 술 먹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 내 빤스도 하나 훔쳐갔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여자친구도 친구의 범위에 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남사친, 여사친과 같은 단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유니콘이나 드래곤 같은 단어로 느껴진다.


아무튼 그런 친구 네 명이 있는데, 서른이 넘어서 만나니 나도 모를 자격지심 같은 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예전엔 그런 것도 없었는데, 이제는 암묵적으로 느껴지는 서로 간의 재력, 연봉, 직업, 결혼 등을 견준다. 나만 쫌생이처럼 그러는지 남들도 그러는 건지 잘 모르겠다. 겉으로는 쿨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야비하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요새는 친구를 만나는 게 즐겁지 않다. 만나면 방구나 똥 얘기나 하며 유치하게 놀지만 예전만큼 즐겁진 않다.


이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친구가 인생의 전부였던 적이 있다. 친구에게 많이 의지하고 언제나 함께 하기를 바랐다. 군대를 갔다 오고,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의지했던 친구에게 배신도 당하는 등 인생의 단계를 지나며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인생은 독고다이, 누가 내 인생 책임져줄 것도 아닌데 누군가한테 의지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내가 남에게 의지하지 않듯, 남도 내게 의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내게 의지하려고 한다면 부담감이 앞선다. 그런데 이렇게 쿨한 척해도 가끔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 건 사실이다.


인생은 모순 덩어리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같이 있으면 혼자 있고 싶다.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솔로가 더 편하다. 결혼도 마찬가지. 그런 모순을 견디는 게 인생인 것 같다. 모순 없이 카리나랑 결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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