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4. 일요일의 기록
시험에 대해 글 쓰는 이 자체가 시험이다. 시험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기에 별로 쓸 것이 없다. 나는 나빴던 기억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지양한다. 글쓰기는 내 정신건강을 이롭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인데, 나빴던 기억에 대해 글을 쓰다 보면 그때의 기억에 천착하여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글쓰기 모임의 좋은 점은 이처럼 평소에 내가 잘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주제로, 사고의 무게 중심을 옮겨 글을 쓰게 만드는 데 있다. 글쓰기 모임이 없었다면 나는 시험에 대해 글을 쓰려는 시도를 했을까?
난 항상 무용한 것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스쳐 지나간 생각, 현재 듣는 음악과 가수에 대한 감상, 만년필의 필기감과 잉크의 농도, 밤만 되면 센치해져서 썼다가 다음날에 낯부끄러워 지워버리는 기록들. 평소 일기를 쓴다면 이런 것에 대해 쓸 뿐, 시험이라는 어떻게 보면 무거운 주제로 글을 쓰진 않는다.
모임을 시작하며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게 됐다. 주제의 경중을 떠나,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억지로라도 쥐어짜 내 브레인스토밍하다 보면 또 다른 내가 발견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글을 쓰는 나 자신도 나에 대해 알게 된다.
시험, 시험이란 뭘까. 이렇게 서론이 긴 이유는 시험에 대해 별로 쓸게 없어서 분량을 늘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시험혐오자다. 혐오와 증오의 시대에 내가 당당하게 혐오한다 말할 수 있는 것. 혐오하지만 사회에 필요한 필요악 같은 것.
어렸을 땐 성적표 나오는 날이 부모님한테 맞는 날이었고, 영단어 쪽지 시험 보는 날도 틀린 개수대로 선생님에게 맞는 날이었다. 고등학생이 되고부터 맞지는 않았지만, 엄마에게 성적표를 보여주고 엄마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는 게 맞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그렇다고 해서 열심히 공부를 한 것도 아니다.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효자도 아니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시험 기간이 다가옴에 따라 커져만 가는 불안과 공포. 나는 아직도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보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공부를 하면서 스트레스받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 공부란 하지 않아서 스트레스받는 것. 시험 기간에는 개미 지나가는 것만 봐도 재밌다.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시기다. 게임을 더 재밌게 하려면 시험을 준비하면 된다. 몇 달 전에 자격증 따려고 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올봄에 플레이스테이션을 산 이후로 그때처럼 재밌게 게임한 적이 없다. 주변 친구와 동료들에게 게임을 재밌게 하고 싶으면 시험공부를 시작하라고 권했을 정도다.
시험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 요즘엔, 회사 생활 자체가 또 다른 시험이다. 일 안 하고 월급만 받고 싶은 데,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한다. 일 안 하고 돈 벌려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다 보니, 어느새 연봉도 오르고 더 많은 책임도 주어졌다. 책임지기도 싫고 일하기도 싫지만 자동차 할부금과 복지성 적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한다. 효율적으로 일하려고 하다 보니 비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치민다. 어쩔 수 없이 사내 정치도 가담한다. 제발 일도 하기 싫고, 정치질도 하기 싫다.
회사는 시험 기간도 없고, 방학도 없다. 365일 시험 기간이다. 1년간의 성과를 토대로 연봉 협상을 한다. 365일 내신 관리, 특정 프로젝트를 통한 중간고사, 성과를 꾸며 말하는 구술 면접. 합산 점수로 나오는 성적표. 학교 시험처럼 객관적이지도 않다. 내 노력이 이 점수에 반영됐을지도 미지수다.
그래도 열심히 일해야지. 커리어를 쌓아야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스트레스받는 상황도 견디다 보면 어느새 지나있고, 견디고 버틴 사람이 승리한다.
시험이란 주제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 난다. 짜증과 스트레스, 만성피로, 욕설이 늘어난 요새. 건조해진 날씨처럼 내 마음도 건조해져만 간다. 목과 코도 건조하여 감기몸살에 시달리고 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나이는 먹어가고, 살은 뒤룩뒤룩 찌고 머리털도 빠지고. 나도 이렇게 아저씨가 되는 걸까.
로또나 사야지. 해답은 로또다. 다음 주엔 회사 때려치우고 포르쉐 파나메라를 계약할 것이다. 이번 주 토요일 저녁,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