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2 - 여름이었다

2024.12.05. 목요일의 기록

by 허건

초등학교 5학년, 난 아이리버 1GB짜리 MP3가 있었다. 그땐 당나귀나 프루나를 이용해 노래를 다운 받았다. 당시 들었던 노래는 MC몽의 천하무적, SG워너비의 죄와벌, 살다가, 버즈의 겁쟁이, 모세의 사랑인걸, 엠투엠의 세글자, 윤도현의 사랑했나봐, 에픽하이의 Fly, 아이비의 바본가봐, 신화의 브랜드뉴.

기억에 남는 노래는 SG워너비의 죄와벌이다.


초등학교 4학년에서 5학년으로 넘어갈 때, 내겐 첫사랑이 있었다.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예전에 '추억' 편에서 글로 쓴 적이 있다. 그때 안 쓴 이야기를 하자면 그녀는 동방신기를 좋아했다. 난 그녈 위해 동방신기의 허그를 남몰래 연습했다. 하루만 네 방의 침대가 되고 싶어. 아주 작은 인형일지라도... 난 영웅재중의 샤기컷 사진을 버디버디 홈피에 열심히 퍼 날랐다. 그녀가 좋아하는 동방신기를 따라 하고 싶었다. 그녀는 내 홈피에 놀러 와 자주 따봉을 눌렀다.


그러다 수련회를 가고 학우들과 첫날밤에 진실게임을 했다. 두 번째 날에는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버렸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는데, 나도 모르게 시원하게 뱉어버린 것이다.

허oo ♡ 김oo.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어버린 그녀는 점점 표정이 썩어갔다.

언젠가 그녀는 내게 "난 바퀴벌레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데, 너가 바퀴벌레보다 더 싫어."라고 했다. 내 고백 아닌 고백은 오발탄마냥 갈 길을 잃었다. 나의 고백 계엄령은 결국 그녀의 마음을 장악하지 못했다. 사랑의 특전사도 그녀의 거센 저항에 물러설 뿐. 그녀를 향한 쿠데타의 실패였다.

그러나 어렸던 난 물러설 줄 몰랐다. 그녀가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여 내게 탄핵을 인용하기 전까진...


그전까지 네모의 꿈, 우유송, 숫자송, 동방신기 이런 노래 밖에 몰랐던 나는 5학년으로 넘어갈 무렵, SG워너비의 죄와벌을 알게 된다. SG워너비를 알게 된 계기도 그녀의 취향이 발라드로 넘어갔기 때문. 그녀는 아직도 초딩 노래에 머물러 있는 내 음악적 취향을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자신은 소몰이 창법의 발라드를 듣는 어른인 것 마냥 굴었다.

나는 SG워너비를 당나귀로 다운 받아 MP3에 넣었다. 죄와 벌. 그녀를 좋아한 게 내게 죄와 벌이 된 걸까.

그녀는 5학년 무렵,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녀가 떠나고 나는 사춘기가 찾아온 것 같다. 우울함이라는 기분을 그때 처음 느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웨스트라이프의 마이러브 가사처럼 텅 비어버린 내 버디버디 홈피엔 철 지난 동방신기의 샤기컷만 남아있었다.


그녀를 향한 사랑은 모세의 사랑인걸, 그녀 앞에만 서면 난 버즈의 겁쟁이, 그녀를 떠나보낸 후엔 윤도현의 사랑했나봐.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엠투엠의 세글자.

특히나 죄와 벌은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노래다. 그녀는 날 F 성향으로 만들었고, 그녀는 나의 죄와 벌을 일깨워 줬고, 그녀는 날 어른으로 만들었다.


이후 내 거처는 싸이월드로 옮겨졌다. 도토리를 이용해 내 마음을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그녀가 찾아올까 봐, 그녀가 좋아할 것 같은 발라드를 주로 선정했다. 그러나 그녀는 찾아오지 않았고 내 음악적 소양만 쌓여갔다. 싸이월드에서도 그녀를 찾아봤지만, 그녀의 이름이 너무 흔해서 결국 찾지 못했다.

다 커서도 가끔 그녀 생각이 나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찾아도 봤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없었던 사람인 것 마냥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있는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이다. 너무 흔해 찾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꿈이다. 어른이 돼서 다시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는 순수함이다.


어른이 돼서도 난 사랑을 떠나보낼 때마다 후회와 자책이라는 죄와 벌을 달게 받았다. 그러다가 대학 시절, 잔나비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을 알게 된다.

나는 가사가 좋은 노래를 좋아한다. 시를 좋아하기에 노래 가사도 시 같은 걸 좋아한다. 난 언제나 뜨거운 여름밤을 보냈지만 남은 건 볼품없었다. 그러나 또다시 찾아올 누군갈 위해서 남겨둬야지. 내게도 순정이 있다. 여름이었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8화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