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폐허, 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
사랑의 생애는 고마움으로 시작해서 고마움으로 끝난다. 내 삶에 나타나준 고마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해서 느끼는 고마움, 나를 사랑해 줘서 느끼는 고마움.
사랑의 생애 사이사이에 낀 부정한 기운들 또한 그 고마움을 지탱하기 위한 부속자재다.
얼마나 고마운지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내 시간이 아직도 멈춰있어서, 난 아직 사랑했던 시간 속에 살아.
그 시간 속에서 당신은 항상 웃고 있어.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 잘못을 바로 잡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지금 드는 생각은 지금의 내가 그때로 돌아가면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다시 돌아가기 싫어진다.
이 아픔도, 슬픔도, 원망과 미움, 고마움, 사랑으로 범벅된 이 감정도 결국 내 마음의 폐허가 되어 허물어질 것을 안다.
모든 새로운 마음은 그 폐허 위에서 자란다. 지금 이 시간은 내 마음을 잘 허물어 철거하는 일. 땅을 다시 다지는 일.
그래서 타임머신을 타기 싫다.(정작 있지도 않지만) 내 마음을 잘 허물기 위해서.
그래서 선암사 낙엽들이 해우소로 가나보다. (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 정호승 시)
잘 썩기 위해서 봄, 여름 푸르던 날 모두 잊고 가장 낮은 곳으로 썩기 위해 해우소로 모인다.
잘 썩힌 낙엽만이 봄의 첫 꽃잎을 밀어 올릴 수 있음을, 우리는 사랑의 생애를 통해 배운다.
그렇게 다시 봄이 오면,
봄날 예뻤던 당신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지만
그래도 사랑해서 고마웠다고
고마운 마음이 먼저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