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용
최근 독서에 열중이다. 올해 벌써 15권을 독파했다. 원래 문학을 좋아하던 나는 편독이 심해지는 것 같아 일부러 비문학을 섞어 읽었다. 그렇게 문학과 비문학의 이분법으로 독서를 하기로 다짐했다. 그런 방식으로 한참을 읽다 보니 단순하게 문학과 비문학으로 나눌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은 내 가슴을 뜨겁게 하고, 비문학은 내 머리를 차갑게 한다고 생각했다. 독서를 하다 보니 문학이 나를 차갑게 만들기도 하고, 비문학이 나를 뜨겁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독서의 카테고리를 다시 재정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고급 표현을 써서 말하자면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형이상학이란 말은, 형태 그 위에 있는 것들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단어다. 우리의 오감으로 직접 만지거나 볼 수 없는 근원적인 원리를 다룬다. 존재, 영혼, 신, 그리고 사랑과 행복.
형이하학은 이 뜻의 반대로 해석된다. 오감으로 직접 만지거나 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어 우리가 직접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는 물질적인 세계를 다룬다.
최근 읽은 형이상학 책은 '사랑의 기술',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어린 왕자', '노인과 바다', '눈물을 마시는 새' 등이 있다.
그 책들은 사랑과 위로, 그리움, 패배하지 않겠다는 의지, 화해에 대해 그리고 있다.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와 반대로 형이하학 책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레버리지', '원씽', '유혹하는 글쓰기', '월가의 영웅', '지리의 힘' 등이 있다.
그 책들은 금융, 주식, 자기 계발, 사회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린다.
독서의 범주를 이렇게 나누다 보니 단순 문학과 비문학으로 범주를 나눠 읽는 것보다 조금 더 독서가 재밌어졌다. 최근 병렬 독서(한 번에 여러 권을 읽기)에 열중인 나는 지하철에서는 밀리의 서재로 형이상학을 읽고,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 빌린 형이하학을 읽고, 퇴근길, 집에 귀가해서 혹은 카페에서, 자기 전에 틈틈이 책을 읽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좇을 땐 인생이 마냥 손에 잡히지 않고 멀리 떠나갈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뜬구름을 잡는 듯 허황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원래 이런 걸 좋아했다. 현실감 없는 이야기, 그 속에서 내 자신을 찾는 이야기를.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읽을 땐 그와 반대다. 인생이 손에 잡힐 것만 같이 보인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내내 하늘을 날아다니다 문득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 중용을 지키는 게 독서를 더 재밌게 만든다.
내내 땅에 발을 붙이고만 살았다면, 라이트 형제가 어떻게 비행기를 만들었을까.
내내 하늘만 날아다닌다면, 밥은 어떻게 먹고 살아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어린 왕자
인생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건 그 사이에서 중용을 찾아가는 것이라 믿는다. 그 어떤 것도 극단적이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게 된다. 그리고 그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신화 속에서 맹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현자로 나온다.
두 눈을 뜨고 있었을 때, 오이디푸스는 부친을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스스로 눈을 멀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딸 안티고네의 손을 잡고 방랑의 길을 떠난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을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한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놓친 것들이 떠오른다. 멀리서 보았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어떤 책에도 적혀 있지 않은, 보이지 않는 '나'라는 존재의 균형점일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는 나를 위해, 나는 책을 읽는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견(見)'으로 이 계절을 통과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