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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Sep 03. 2023

언니는 탐험가를 했어야 해!

오늘 에세이




서울구경 갑니다.




태어나서 쭉 경기도에 살았다. 이십 대에는 서울로 출퇴근하고, 종로나 강남, 을지로, 명동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요즘은 광역버스나 KTX덕분에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들어가서, 경기도에서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먼 거리로 출퇴근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서울까지 가는 일이 먼 여행길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사이에 집 근처에서 지내는 일이 많아지면서 내가 사는 곳에서 서울까지 가는 것은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다.  '서울구경 갑니다'라는 말이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그 '서울구경'을 가게 되었다. 친구들도 한동네에서 자주 만나던 사이인데 한 친구가 양평으로 이사를 가고, 취업을 하는 친구도 생기면서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서울구경은' 나름 설레는 시간이었다. 미술관 전시회를 관람한 뒤 덕수궁 돌담길도 걸어보고 맛집도 찾아가기로 했다. 서울사람이라면 맨날 오가는 길이겠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볼거리도 즐길거리도 많다. 시청 앞 콩국수 맛집도 근처 직장인이라면 자주 먹는 음식이겠지만 일부러 콩국수를 먹으려 한 시간 이상 달려가는 일은 나에게는 드문 일일 니 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날의 경로는 아침 일찍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 내려 덕수궁 돌담길을 조금 걷다가 정동길에 들어서면 문이 열린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을 하고 미술관 관람을 한 뒤에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거나 책방에 들리는 것이었다. 계속 변모하는 서울에는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넘쳐난다. 그렇지만 제대로 알아보고 가지 않으면 막상 무엇을 먹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헤매게 된다. 일단 목적은 서울시립미술관 '에드워드호퍼전'이니 전시회에 집중하면 목적은 달성된다. 그렇지만 번외로 이것저것 구경하고 하루를 알차게 보낸다면 기분도 좋고 뿌듯할 듯싶어 놀거리를 검색해 보았다.



덕수궁 돌담길과 미술관





작년 덕수궁 돌담길에 단풍이 노랗게 물들던 때 걸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지금은 담장 너머로 푸릇푸릇 초록잎들이 햇빛에 반짝 거린다.  '에드워드 호퍼'라는 화가는 잘 모르지만 생활에서 자주 접했던 그림 덕분에 친숙하게 느껴졌다. 전시회는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호퍼의 개인전이다.  관람객이  넘쳐나서 입구부터 줄을 서야 했다. 놀이동산처럼 손목에 입장팔찌를 두르고 차례차례 들어갔다. 그림 하나하나 감상하는데도 줄을 서야 했다.





호퍼의 뮤즈인 아내 조세핀호퍼를 모델로 그린 '햇빛 속의 여인'을 모티브로 재구성한 포토존





호퍼의 스케치




처음 호퍼의 그림은 어둡고 탁한 화풍에서 시작한다. 점점 스케치가 세밀해지면서 에칭판화를 거쳐 화사해지는 호퍼의 그림은 다양한 분야에 열정적으로 도전하며 관찰에 상상을 더해 도전하는 힘이 느껴졌다. 연극관람을 좋아했던 호퍼는 극장의 풍경을 그림으로 많이 그렸으며, 부인과 함께 관람한 극장표를 수집하기도 했다. 자신의 태어난 미국의 도시와 도시의 사람들을 그렸고, 유럽에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새로운 화풍에 눈을 뜨기도 했다. 자동차를 구입해 부인과 여행을 다니며 그렸던 그림에서는 자연의 풍광이 웅장하면서도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1,2,3층의 다채로운 화가의 작품들은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여러 장의 스케치를 그렸던 호퍼의 근성을 보여준다. 그 근성이 바로 호퍼의 재능이지 않았다 싶다. 왕성하게 탐험하고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호퍼의 삶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관람이 끝나고 시청역 9번 출구로 갔다. 콩국수 맛집이 있는 곳이다. 1시가 넘었는데도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홀은 생각한 것보다 더 넓었고 차례는 빠르게 돌아왔다. 자리에 앉으니 척척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하고 금세 음식이 나왔다. 소문난 맛집에 오면 입소문만 과한 것이 아닌가 설마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제발 기본맛만 해라 생각한다. 그렇게 기대 없이 맞이해서인지 허기가 져서 인지 생각보다 걸쭉하고 진한 국물, 고소하며 맛있는 콩국수에 감탄사를 내뱉였다. 쫄깃하고 적당히 두꺼운 면발, 그리고 무엇보다 1인 1 김치가 마음에 들었다. 달달한 겉절이에 고소한 콩국수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니 배가 두둑했다.







일상 탐험가





걸어서 을지로까지 가고 싶었지만 8월의 무더위, 게다가 오후 2시는 걷기에는 무리였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 3가로 갔다. 예전에 인쇄소에 갈 일이 있어서 들렀던 카페였는데 인상적이어서 친구들과 함께 오고 싶었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의료기관이었던 혜민서 건물을 개조한 '커피한약방'은 이름처럼 한약방 느낌을 재현해 낸 모습이었다. 을지로는 옛 모습 그대로의 골목길이 남아 있는데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주홍빛 불빛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은은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사진 찍기에도 좋고, 낭만을 즐기기에 좋다. 커피한약방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바로 옆 혜민당에서는 디저트를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 이층에도 자리가 있는데 2층 홀이 조금 넓다.


이렇게 서울 시내를 구경하며 색다른 카페의 느낌도 즐기다 보니 함께 간 동생이 '언니는 꼭 탐험가 갔다'라고 한다. 그 말이 기분 좋아 다음에는 좀 더 색다른 볼거리를 준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영화 속 인디아나존스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황금을 찾아 모험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왕성하게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산했던 화가, 호퍼의 일생처럼  이곳저곳에서 재밌는 보물을 찾아내는 내 모습은 어쩌면 일상의 탐험가 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말이 참 마음에 드네.




맛있는 커피 볶는 집 [커피 한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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