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밥솥이 뜸 들이기를 끝내고 나서 뚜껑을 열었다. 뽀얀 김이 올라오고, 주걱으로 잘 지어진 밥을 살살 풀어놓는다. 아이 밥그릇에 밥을 푸고 나니 주걱에 밥풀이 몇 개 묻어 있다. 밥풀 하나라도 버려지지 않게 내 입속으로 하나하나 떼어내서 꼭꼭 씹어본다.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갓 지은 밥의 맛. 난 한 번씩 설거지를 하다가 떨어져 나가는 밥풀을 보면 슬퍼진다. 밥풀 하나의 허망한 운명 때문이다. 어쩌면 하수구를 통해 먼바다로 자유로운 여행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일까? 어쨌든 밥풀 하나하나를 생각하다가 얼마 전 본 영화가 생각났다.
100만 관객을 돌파한, 유해진 김희선 주연의 [달짝지근해 7510] 이다. 오랜만에 보는 로맨스 코미디 영화다. 유해진의 첫 멜로영화가 김희선을 만나 멋지게 연출되었다. 멜로 영화는 선호하는 편이 아닌데 비슷한 또래의 이야기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 호감이 갔다. 오랜만에 남편과 극장 나들이를 했다. 이야기는 대충 예상이 갔지만 잔잔하고 위트 있게 삶을 다루는 감독의 솜씨가 마음에 들었다. 따뜻한 대사들이 마음에 많이 와닿았는데 기억에 남는 단어가
밥플이다
타고난 미각을 가졌지만 현실 감각은 전혀 없는 제과 회사 연구원 '치호'{유해진]는 집, 자동차, 회사가 전부이며 맥도널드 드라이브스루에서 햄버거를 주문하는 것이 작은 행복이다. 치호의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균일을 가져오는 일이 생긴다. 세상 긍정 마인드를 가진 '일영'(김희선)의 출연이다. 일영은 아이를 혼자 키우며 온갖 어려운 일들을 해내면서도 명량함을 잃지 않는다. 일영은 갚지 못한 대출금 연장을 하러 찾아간 대출업체에 취업까지 할 정도로 유쾌하고 당당하게 살아간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치호의 형(차인표)의 도박빚이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된다. 어느 날 일영은 치호를 집에 초대해 밥을 대접하게 된다. 대접이라기보다는 혼자 먹기 싫은 밥을 함께 먹자는 거였는데 따뜻한 집밥을 오랜만에 먹어보는 치호는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그러면서도 조금 부담스러웠던 치호는 일영에게 밥값을 지불하려고 한다. 그런 치호에게 일영은 자동차를 같이 타는 카플처럼 함께 밥을 먹는 밥플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나는 이 말이 너무 좋았다.
함께 밥을 먹는 '밥플'도 좋고, 작은 하나의 존재 '밥풀'도 좋다.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밥플이라고 생각하세요.
차를 같이 타는 건 카플, 밥을 같이 먹으니까 밥플, 어때요?"
이런 일영의 말에 누구라도 웃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김희선은 여전히 예쁘고 밝다. 유해진은 특유의 순수한 연기를 펼친다. 순수하고 솔직한 일영과 치호의 사랑이야기에 감초 배우들의 열렬한 지지 연기로 풍성해진 영화 이야기가 재미있고 뭉클하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인 장면 없이 따뜻하게 마음을 울리는 유쾌한 영화를 봐서 기분 좋았다.
요즘 우리 가족도 각자의 생활 패턴이 다르고 밖에서 밥을 먹는 일이 많다 보니 다 같이 식탁에 모이는 일이 드물다. 오랜만에 식탁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밥을 먹고 싶어 진다. 한 톨의 살알 속에 들어 있는 모두의 땀방울을 생각하며, 그 안에 담긴 자연의 풍요로움과 함께 서로의 마음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