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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Sep 01. 2023

'정직한 고독'을 이겨내고 나아가자

오늘 에세이



잘 차려진 밥상



책상 위에 가방만 덩그러니 놓아둔 채 급한 전화통화를 하느라 주변이 어수선하다. '동화 쓰기 문집발표회'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교실로 슬며시 들어갔다. 난 항상 좀 그렇다. 어딘가 두리번거리고 어수선하고 이곳이 아닌, 저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 와중에 커피 한잔은 빼놓지 않는다. 교실은 벌써 잔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누군가는 떡을, 누군가는 음료와 과자를, 누군가는 화사한 꽃다발을 준비했다. 그리고 고운 문집이 차곡히 쌓여 있었다. 마음만 들고 두 손은 가볍게 온 나는 멋쩍게 자리에 앉았다. 글쓰기 수업을 여럿 받으면서 문집을 만드는 일에 시큰둥해 있었다. 서툰 글들을 모아 만든 책들은 잭꽂이에 꽂힌 채 먼지가 쌓여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저 함께 수업을 들은 문우들 얼굴이나 보자는 마음으로 생각 없이 왔던 것이다.


잘 차려진 밥상을 보니 마음이 뜨거워졌다. 문집 발표회를 이렇게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보통은 만든 문집을 나눠가지고 이런 저린 담소를 나누고 마무리했던 것 같은 기억인데 이번 "나의 인생 나의 동화"문집 발표회는 달랐다. 동화를 쓰는 내내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따뜻하고 다정했는데 발표회날 정점을 찍었다. 보통은 수업이 끝나고 잘 다듬어진 완성된 글 한편 정도를 대표로 문집에 담지 않나? 그런데 이번 수업에서는 에세이, 동화, 그림책까지 세편의 완성본을 제출했다. 힘겨운 사람은 꼭 세편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모두 열정적으로 세편의 글을 완성해 냈다. 전문가도 아닌데 그림책 내용에 맞춘 그림까지 그려낸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동화를 쓰며 느꼈던 감정들과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며 소감을 나눴다. 박완서작가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낭독하고 마음에 와닿는 부분을 잠시 필사하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가졌다. 그 생각을 다시 각자의 말로 풀어냈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부분을 필사했다. 나도 같은 부분을 필사했다.


작가는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라톤 경기를 보게 된다. 그리고 거의 꼴찌다 싶은 선수가 힘겹게 뛰어가는 얼굴을 보고 만다.


"나는 그런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꼈다. 여태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들,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이십 등, 삼십 등을 초월해서 위대해 보였다. 나는 그를 위해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좀 전에 그 이십 등, 삼십 등을 우습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도 자기의 이십 등, 삼십 등을 우습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엣다 모르겠다 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않아 버리면 어쩌나, 그래서 내가 그걸 보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어떡하든 그가 그의 20등, 30등을 우습고 불쌍하다고 느끼지 말아야지 느끼기만 하면 그는 당장 주저앉게 돼 있었다. 그는 지금 그저 그가 괴롭고 고독하지만 위대하다는 걸 알아야 했다.
나는 용감하게 인도에서 차도로 뛰어내리며 그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질렀다. "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박완서 / 지성사-



"이제 꼴찌를 바라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동화를 쓰려면 춥고, 그늘진 곳 그곳을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뭉클했다.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이 이제 이 교실을 나가며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해 주었다.


모두가 1등에게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마라톤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주를 위해 달리는 꼴찌 선수의 얼굴에서 정직한 고통과, 고독을 이겨내는 힘을 발 건하고 박수갈채를 보낸 작가처럼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꼴찌다. 동화는 그런 것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눈길을 줄 수 있는 것, 그곳에서 아직 남아 있는 온기를 찾아내는 것. 희망을 노래하는 것.  선생님 말씀처럼 동화를 쓰며 내 마음이, 내 눈이, 내 발걸음이 꼴찌들을 향해 박수갈채를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어쩌면 꼴찌로 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멈추지 않는다면 이 인생도 멋지게 완주를 할 수 있겠지. 그 길을 서로 다독여주며 손잡아 주는 동료들과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다. 때론 혼자 견뎌내야 할 일도 있겠지만 두 겹줄, 삼겹줄로 연결된 마음의 동료가 있다는 것은 든든하니까.


2부에는 본인이 쓴 동화나 에세이의 한 부분을 골라 조별로 이어 낭독하기를 했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엮어지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의 삶이 동화라는 이야기 속에서 이어지는 것처럼.  마지막 문장을 합창하듯 낭독하고 나면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듯 끈끈한 정이 느껴졌다.


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로 망설이던 발을 내딛기로 결심했다.

나 또한 환희가 없는 고독과 고통 속에서도 유쾌하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보련다.



치열하게 땀을 흘리며 지내온 여름, 어느덧 그 여름의 끝자락에서 서있다. 초록이 견디어 온 태양의 시간이 이제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 갈 때쯤이면 희미한 나의 도화지에도 스케치 정도는 그려지지 않을까.






이미지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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