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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Jan 26. 2023

빛나는 나의 친구


나이 사십이 다 되어서 만난 친구가 있다.


친구라는 말이 참 좋다. 다정하다. 나이를 떠나 함께 세월을 견디며 헤치고 나아가는, 마음이 잘 맞는 진짜 친구들이 있다. 나이가 동갑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친근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유아를 위한 연극 동아리에서 만난 L의 첫인상은 수줍고 조용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가끔 엉뚱하고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다. 미술을 전공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리거나 만드는 일이 생기면 모두 L을 바라보았고 그 기대에 부흥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그녀는 열심히 그리고 만들며 묵묵히 땀을 흘렀다.


마음이 여린 L은 사람들의 수다 속에  마음 깊숙한 슬픈 사연이 나오기라도 하면 제일 먼저 눈시울을 붉혔다. L의 첫 배역은 미역이었다. 연극의 배경이 바닷속이었는데 대본에도 없는 미역을 만들어 내더니 초록색 의상과 소품으로  그럴듯한 미역이 되어 나타났다.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이었다. 움직이는 미역을 아이들은 많이 좋아해 주었고 신이 난 L은 책 읽기도 더 열심히, 연극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L의 만들기와 그리기는 점점 활력을 가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잡지 않던 붓을 손에 든 모습이 활기차보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들의 연기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신데렐라' 공연을 할 때는 사람 크기에 맞는 마차모양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누군가 재활용쓰레기에서 커다란 냉장고 박스를 주워왔던 것 같다. L의 솜씨는 "역시"라며 인정을 받았고 점점 실력 발휘를 했다.


L은 사람들의 장점을 잘 찾아 주었고 칭찬해 주었다. 나도 L이 칭찬을 해 줄 때면 괜히 으쓱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잘 어울리는 옷의 색깔도 알려주고 그런 옷을 입었을 때 빛나는 눈으로 진심을 담아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어느 날은 보이시한 옷이 입고 싶어 어깨 패드가 들어간 빅사이즈 재킷을 입고 나타났더니  '음.. 이건 아니야' 하고 안타까워한다.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장점을 찾아 주고 진심 어린 칭찬을 아끼지 않던 L의 표정에서는 그야말로 나를 걱정하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L과 함께하는 두 명의 친구가 더 있는데 우리 넷은 서로 합이 찰 맞았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조금은 피곤해하는 성향인 내가 편안하게 만나는 몇 안 되는 그룹 중 으뜸이다. 우리 넷은 나이가 다 다르지만 친구처럼 지낸다. 어떤 땐 나이가 가장 어린 막내가 언니 같을 때도 있다. 우리 넷이 만나면 언제나 깔깔깔 웃음이 넘치고 나는 내성적인 성향의 껍데기를 벗고 나도 모르게 수다쟁이가 되어버린다. 어디에 이렇게 숨겨 놓은 이야기보따리가 있었는지 스스로도 멈추지 않는 입에 놀랄 지경이다. 친정엄마가 본다면 깜짝 노랄 일이다. 어릴 적부터 나는 자타공인 말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가 만나지도 십여 년이 되어 간다. 왜 이제야 만났을까 안타까워하며 함께했던 우리의 자원봉사와 취미 활동은 그녀가 양평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함께 하기 어려워졌다. 미루고 미루던 양평으로의 이사 더 이상 늦출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총 맞은 것처럼"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이다. 가수 백지영 노래의 가사가 이렇게 절절하게 다가올 줄이야. 바람도 차가운 겨울 뻥 뚫린 가습으로 찬 바람이 횡 지나가는 것만 같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어찌 옛말은 이렇게 하나 틀린 것이 없단 말인가? 양평이 천리길도 아니고 하루에 서울에서 부산을 오고 갈 수 있는, 제주도도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이런 스피드 한 세상에 부지런히 전국을 누빌 기회로 삼아야겠다.


그녀는 눈부셨다. 그녀의 난 자리는 그녀가 남기고 간 눈부신 햇살의 조각들이 언제나 따뜻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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