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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Nov 28. 2022

글의 맛

추억 소환


한 달에 한 번 있는 '글쓰기' 모임 날이었다.  합평이 한창 진행일 텐데 한 시간이나 늦어 문화교실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갔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영문 모를 박수세례를 받았다. 무슨 일인가 싶다가 일단 좋은 기분을 즐겼다. 발표자들의 출석이 늦어지면서 먼저 온 회원들이 오늘 발표될 수필 3편과 기존 작가의 좋은 수필을 모두 낭독한 후였다. 오늘도 훌륭한 수필을 썼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다음 5분 차이로 지각한 발표자가 들어왔다. 기분 탓인가? 더 큰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무 재밌었다는 구체적인 칭찬이 이어졌다. 그다음 지각생이 또 뒤늦게 문을 열고 들어오니 이번엔 박수와 함께 감탄의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박수 소리가 점점 커진다고 내가 실망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글을 읽고 나니 살짝 질투가 났다.


역시 잘 썼다.      


J작가님은 언제나 글 속에 위트와 재치가 넘쳐난다. 평소에 사물이 어떤 말이라도 걸어주나 싶게 동화 같은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때로는 삶이 개그인가 싶게 뭐 저리도 재밌는 일이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에피소드에 감칠맛이 난다.

P작가님은 예상치 못한 아름답고 풍부한 감성이 글 속에 녹아 있어서 읽고 있으면 달달한 디저트를 먹고 있는 것 같다.


모두의 글에서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맛이 느껴진다.  입맛을 다시게 한다. 뺏어 먹고 싶다. 처음에는 뭔가 대단한 재료를 찾던 나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로, 손맛대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내듯 감칠맛 나는 글을 쓰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운 마음뿐이다.


한 번은 S작가님의 추억을 소환하는 수필이 소개된 적이 있었다. 중학생 시절 매일 다니던 등굣길이 지금은 전혀 알아볼 수 없게 개발되어 그곳을 지나며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난 이야기였다. 글을 읽으며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여행의 기분을 느껴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먼 곳을 가지 못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지 못해서, 해외여행을 다녀오지 못해서 도저히 쓸거리가 없다고 낙심에 빠지고 투덜대던 나를 자연스럽게 과거로 시간이동을 시켜 주었다.

중학생 때 나는 한동안 버스를 두 번 타고 등교하게 되었는데 회수권을 아끼려고 버스를 한 번만 타고 나머지 거리는 걷게 되었다. 그 길이 생각보다 길었다. 몇 분이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몇 시간이 지나 날이 저문 후에야 집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때 걸은 거리가 미아사거리에서 의정부까지이니 지금 걸어도 3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어서 연락도 되지 않고 집에서는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오후 세시쯤이면 아이들이 모두 하교를 하였는데 날이 어두워지도록 돌아오지 않는 막내딸을 발만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가족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1남 5녀 중의 다섯째 딸인 나는 집이든, 학교든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생각들에 빠져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였지만 발표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 글로 써놓았다가 다음에 발표를 꼭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아들과의 트러블로 갑자기 집을 뛰쳐나와 고향까지 멍하니 기차를 타고 달려간 기분을 실감 나게 묘사한 K 작가님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정지용 시인의  [향수]가 떠올랐다. 우리 모두 각자의 고향에 방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며 들뜨기도 했다.

글 속에 소개되지 않은 아들과의 사연이 궁금하여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니 못내 그 사연을 들려주셨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언쟁으로 마음 상한 아버지가 가출을 했는데 당시에는 속이 많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글로 풀어내니 응어리진 마음도 풀어지는 듯하였다.


이렇게 글쓰기를 통하여 마음속 추억을 소환하거나 상한 마음을 풀어내며 공감을 경험한다. 감성의 세포들이 깨어나고 글쓴이와 글을 읽는 이들의 라포(rapport)가 형성되는 시간들, 그것이 바로 글을 쓰고 읽고 나누는 묘미인 것을 알아간다.

혼자서는 쓸 수 없었던 이야기 바다에 함께 그물을 던지고 문장을 낚아 올린다. 혼자 먹는 밥보다 같이 모여 왁자지껄하게 먹는 밥 맛이 더 좋은 것처럼 문장을 주고받으며 맛깔스러운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간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쯤 오랜만에 나온   J작가님은 양손에 가득 들고 온 간식을 펼쳤다. 유기농 고구마와 껍질까지 먹어도 떫지 않고 아삭아삭 감칠맛 나는 감, 귤을 접시에 차려 냈다. 달달한 커피와 함께 이야기가 버무려져 풍성한 식탁을 만들어 냈다.



 

아! 이것이 글의 맛이지. 겨울 김장보다 잘 숙성되어 깊은 맛이 나고 국산 콩두 부보다 담백하고 때론 참기름처럼 고소하며 가끔 이국적인 도 나는, 온갖 삶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남의 이야기에 눈물짓고 내 삶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래서 함께 웃고 뭉클해지는 시간.

한때는 남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남의 일기장 같은 이야기가 책꽂이에 쌓여 먼지를 덮고 있을 때도 있었다. 이제 그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좋아진다.

시시콜콜한 일상도 누군가에 들려주고 싶다. 이게 사는 맛, 글 쓰는 맛 아닐까.


#글의 맛#합평#수필#추억#공감#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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