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게르다

트롤의 거울 조각을 녹이는 녹음의 계절

by 한량아끼
생의 조각 앞에서.jpg '나만의 게르다' 일러스트 / 한량아끼

소년, 카이는
트롤이 만든 마법의 거울 조각이 눈과 심장에 박히고 나서
사랑하던 것들을 더는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진실을 보지 못한 채,
차가운 겨울 왕국으로
눈의 여왕을 따라 떠나버렸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카이 한 사람의 비극만은 아니었다.

거울은 10억 개의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고,

모래보다도 더 잘게 쪼개진 파편들은

바람을 타고 떠돌다

사람들의 눈과 심장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조각은 심장을 얼음처럼 차갑게 만들었고,
눈은 세상의 추하고 나쁜 것만을 보게 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했고,
가까운 것보다 멀고 큰 것에 더 집착하게 되었다.


어릴 적,

그렇게도 빨리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된다는 건

그 트롤의 거울 조각 하나

마음 어딘가에 들인 채 살아가는 일이었다.

그렇게 어른이 된 우리는

생의 찬란한 순간조차

그저 번거롭고 귀찮은 일로 느끼고,

진심 어린 웃음조차도

‘나중에’라는 시간 속으로 밀어두며 살아갔다.


그러는 사이,
벌써 녹음은 짙어졌고
초록햇살 가득한 창밖 풍경은
마음의 응달까지 조용히 파고들어

트롤의 거울 조각이 있던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렇게 별것 아닌 순간들이

어느샌가 나만의 게르다가 되어

내 안의 얼어붙은 조각들과 조용히 싸워주고 있었다.


스며든 햇살,

함께 걷는 발걸음,
문득 피어나는 미소가 되어

나만의 게르다가 되었다.


아이의 조잘조잘한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궁금증을 품고 있었고,
그 말들 사이로 스며드는 웃음은
한낮의 햇살처럼 반짝였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자체로 완성된 생의 조각 하나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을.


부디,

‘어른’이라는 이름에 갇혀 얼어버린 조각들이

이 찬란한 생,

나만의 게르다 앞에서는

잠시라도 녹아내리길.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을,

‘나중’이 아닌 '지금'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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