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은 빗줄기에 바람까지 요란하니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베란다 창을 타고 빗줄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덜컹거리기까지 하는데, 되려 마음은 차분해져 집콕하며 책 읽기 딱 좋은 이틀을 보냈습니다. 사흘 연휴 중 하루는 개이겠지 했는데, 마지막날인 오늘마저 비가 내립니다. 비가 잦아든 틈을 타서 밖으로 나가볼 생각을 합니다. 벌써 이틀을 걷지 못한 나의 몸은 걷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테지요.
"좀 걸을까?"
TV를 보고 있는 남편을 넌지시 꼬셔봅니다.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니 혼자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좀 걷고 올게."
우산을 받쳐 들어도 비바람이 바짓자락을 적십니다. 우산을 잡은 손끝도 조금 시립니다. 바닥에 뒹구는 나뭇잎들, 꺾어진 여린 가지들이 바람이 심상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길을 따라 혼자 일부러 더 씩씩하게 걸어봅니다. 먼 산에 비구름이 걸렸고, 비에 씻긴 산은 더욱 싱그럽습니다. 매일 걷는 동네길이지만 매일 다릅니다. 함께 걷는 것도 좋지만 혼자 걸을 때면 또 다른 좋은 점이 있습니다. 옆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나의 속도에 따라 눈길이 닿는 것에 머무르고 싶은 만큼 시간을 쓸 수 있습니다. 옆사람과 이야기를 하느라 미처 보지 못한 채 지나쳤던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듣고 싶은 음악을 들어도 좋고, 걷기 루틴을 벗어나 다른 길로 빠져보아도 그만입니다.
오늘 혼자 걸으며 큰 보물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바로 플라타너스 꽃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지나다녔는데도 어떻게 이 꽃을 처음 보았을까요?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의 걷기가 하루 중 저녁식사 후라서, 다소 어둑어둑해진 시간대라서 그랬을까요? 플라타너스 열매는 보았지만 꽃을 본 것은 처음입니다. 열매를 보면서도 어떻게 꽃에 대한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요? 아마도 '플라타너스 꽃은 너무 수수해서 눈에 띄지 않나 보다'하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순전히 혼자만의 근거도 없는 생각이었습니다. 플라타너스 꽃은 큼직하면서도 고상하며 화려한듯하면서도 다소곳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고 신기하고 예뻐서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가을날 플라타너스가 단풍이 들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데, 그 큰 이파리가 노랗게 붉게 물들었다가 가을색으로 변하며 길 위에 소복하게 쌓이는 모습을 나는 정말 오랫동안 바라보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탐스러운 꽃을 품고 있었다니요. 요리 보고 조리 보고 오래 쳐다봅니다. 이 순간 나무 한그루는 우주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나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고상하고 함박한 플라타너스 꽃
비가 오면, 더구나 세찬 비가 내리면 길 위에서 사람들 모습은 드뭅니다. 간간이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 하루라도 걷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사람들 몇몇이 비 오는 날 풍경이 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비가 와도, 세찬 비가 와도 멈춤이 없습니다. 그때그때 미루는 법이 없습니다. 담쟁이는 커다랗게 잎을 키워 축대를 초록으로 장식했습니다. 벚꽃이 진 자리에 버찌가 발갛게 달렸습니다. 어느 집 정원에는 새순들이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나는 혼자 걸으며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발견하고 기쁠 수 있습니다. 돌아올 때는 상가가 늘어선 길을 걷기로 합니다. 딸에게 줄 달콤한 라즈베리 요커트 조각케이크 하나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