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티아고 신부다], 인영균 끌레멘스
카미노를 걷는 사람은 저마다 이유가 있다. 어떤 이는 단순히 걷는 것이 좋아서 산티아고 순례를 나선다. 지금 삶에서 멈추고 미래를 고민하기 위해서 온 사람도 있고, 자신의 일상과 책임에서 벗어나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하여, 처음의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멀리 길을 떠나온 사람도 있다. 카미노에 있는 사람은 그 동기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모두 순례자이다.(89쪽)
몸의 카미노: 프랑스 카미노 중 생잔피에드포르에서 부르고스까지 281.8Km가 몸의 카미노 구간. 해발 1000미터가 넘는 피레네산맥을 넘어서 부르고스까지 체력소모가 매우 큼.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몸을 통해 만난다. 몸은 나의 한계, 약함과 불완전함을 상징한다. 육체의 한계를 통해 유한한 존재로서의 나를 대면하는 것. '카미노는 내 마음대로 요리할 수 없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날것', '생것'이다. ...... 카미노는 사람을 봐주지 않는다. 비가 세차게 퍼부어도, 눈이 펑펑 쏟아져도,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햇살이 얼굴을 태워 버릴 듯 강렬해도, 돌길투성이라도 한 걸음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한다. 그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걸어야 한다.(105쪽)
우아하고 고상한 멋진 순례를 꿈꿨는데 현실은 악몽이었다고
하지만 함께 유숙할 그 사람들을 내가 선택할 수 없다. 같은 길을 가는 순례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낡은 알베르게 시설을 불평해도 이 또한 부질없는 짓이다.
카미노에서는 필요만 남고 불필요는 내려놓게 된다.
NO PAIN, NO GLORY
몸이 편해지는 대가엔 자유를 팔아야 하는 잔인함이 숨어 있다.
자기 짐을 멘다는 것이 순례자의 기본
카미노가 '날것', '단순함의 연속'임을 받아들일 때 진정 카미노는 시작된다.
정신의 카미노: 부르고스에서 라바날델카미노 251.2Km 구간.
메세타는 여름에는 땡볕을 피할 곳도,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을 피할 곳도 없는 텅 빈 평원이다. 하늘, 땅 그리고 나밖에 없다. 앞서가는 사람이 점처럼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뒤에 오는 사람도 점처럼 보인다. 진정 외롭다. 부부가 같이 걸어도 외롭다고 한다. 나 자신이 철저히 혼자라는 엄중한 진리를 몸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느낀다. 순례자는 철저히 혼자다. 이 세상에 홀로 던져진 존재임을 철저히 체험한다. (118쪽)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사람들은 참 많이 운다..... 서러워서 울고 행복해서 울고, 아파서 울고 기뻐서 울고, 미워서 울고 사랑스러워 운다. 주위에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실성한 사람처럼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큰 소리로 웃기도 한다...... 산티아고 순례자는 앞을 향해 걸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내 안에 잠재된 '기억과의 대면'이 일어난다. 그것이 생각으로 터져 나온다. 심리학에서 생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들이닥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카미노에서는 다양한 기억과 만나게 된다.(124~125쪽)
영혼의 카미노: 라바날델카미노에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244.6Km 구간
나는 순례자에게, 카미노는 무작정 걷거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을 선물로 발견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136쪽)
순례자 산티아고는 순례자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카미노는 가짜라네.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이 순례를 다 마치고, 그대가 떠났던 삶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진짜 카미노가 시작된다는 것을 명심하게나. 참된 순례길을 위해 이 가짜 순례길이 존재하는 것이니 이 길이 바로 우리의 영적인 길이라네. 일상 삶이라는 진짜 카미노를 걸을 때도 그대와 함께 걸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게나!"
진짜 순례길은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삶의 자리' 그곳에 있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 안으로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길'이 보일 것이다. 이 새로운 길, 곧 우리의 일상 삶이 바로 '진짜 카미노'이다. (2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