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 그것도 이 좋은 계절에, 집콕하며 보낼 수 없었다. 이곳저곳 여행지를 검색하며 며칠을 보냈다.
'맞다. 노고단!'
여름부터 남편에게 '노고단에 가고 싶다'는 말을 종종 뱉어내고 있었다. 십 년 전쯤 안개비 흩날리던 날, 노고단을 처음 찾았던 날, 운무가 하얗게 지리산을 덮으며 몽환적인 풍경을 그려내던, 고원에 바람이 흐르고 바람 따라 눕던 들풀과 풀꽃들의 인상을 나는 매우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만 커지고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노고단 탐방예약을 미리 해야 한다고 했다. 추석 연휴 기간 모든 날들이 이미 예약완료 되었고 마지막날인 3일만 예약이 가능했다.
"오빠, 노고단 가자!"
"아들, 3일에 지리산 노고단 갈 수 있겠니?"
고맙게도 모두 좋다고 했다. 노고단 일출을 볼 욕심을 내어 숙소도 예약했다. 가을에 지리산 노고단은 어떤 모습일까? 운해는 볼 수 있을까? 넓은 초원 같았던 고지대에 서면 그때 그 바람과 풀들의 춤을, 함초롬하고 순수함을 머금은 들꽃을 만날 수 있을까? 노고단의 첫인상은 그대로일까? 세월이 흘렀고 나도 그 세월만큼 나이 먹었으니, 더 깊은 인상으로 푸근하게 안길까? 설레고 있었다.
구례 화엄사.(가는 길에 들리면 좋은 곳)
국보가 많고, 사찰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크다는 각황전이 있는 화엄사. 툇마루에 앉아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단아하고 고풍스럽게 앉은 각황전을 바라본다. 단청이 빛이 바래고 벗겨져 오래된 나뭇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각황전은 햇살 좋고 바람 좋은 날이라 그런지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오래된 건축, 수령이 오래된 나무, 오래된 것들 속에 있으면 겸손해지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다 이해한다'고 토닥토닥 해주는 것 같다.
화엄사 각황전
사사자삼층석탑과 소나무
노고단 게스트하우스 부엔까미노.(숙소)
노고단에 가기로 결정한 후 숙소를 예약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노고단 게스트하우스 부엔까미노'를 알게 되었다. 다행히 방이 있었고 내 취향과 맞을 것 같아 예약했다. 가격도 저렴하고(1박 88,000원, 할인이 되는 사이트도 있어서 우리는 만오천 원 정도 할인된 금액으로 이용했다.) 주인장이 여행 작가라 누구보다 여행자의 마음을 잘 헤아릴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노란 코스모스(?)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해가 뉘엿 넘어가기 직전, 부드럽고 온화한 햇살이 내려앉은 꽃밭은 이른 점심으로 허기진 우리를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하며 환대하는 듯하였다.
외관은 다소 허름해 보이지만, 현관문을 열자마자 '여행에 진심이 사람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길, 여행, 산티아고, 걷기, 지리산, 책, 고양이...... 정돈되지 않은, 하지만 어떤 질서에 의해 배치된, 갑자기 들이닥친 여행객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로운 주인장. 자유로움, 그리고 주인장의 여행 철학과 취향이 가득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지리산 흑돼지 구이 주문하면 되나요?"
"네. 주문하시면 시간을 정해줍니다. 지금 주문하시면 6시 30분에 내려오시면 됩니다."
"저희가 이른 점심을 먹어서 지금 배가 좀 많이 고픈데요. 좀 당길 수 있을까요?"
"그럼, 6시 괜찮나요? 산수유 막걸리도 맛있습니다."
지리산 흑돼지구이에 산수유 막걸리. 저녁 메뉴가 딱 좋다.
산을 좋아하고 걷기와 여행에 진심인 주인장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게스트하우스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저녁 시간이었다. 바질 가루가 뿌려진 지리산 흑돼지가 잘 구워져 나왔다. 지리산에서 키운 상추 깻잎 겉절이와 밑반찬, 산수유 막걸리. 소박한 밥상지만 넉넉했고 7080 팝송이 기분 좋게 흐르고 은은한 조명이 고요하고, 가족이나 연인이 옆테이블에서 정담을 나누는 소리가 정겹고...... 행복한 분위기가 고요한 지리산 자락 마을을 감싸며 흐르고.....
"고노단 일출 보려면 몇 시에 출발해야 할까요?"
"새벽 4시에는 출발해야 해요. 성삼재 휴게소까지 50분 정도 걸리고 거기서 노고단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리니까요. 엄청 추워요. 파카 준비했어요? 적어도 패딩은 입어야 하는데요."
"그렇게나 추워요? 긴팔에 바람막이는 안될까요? 일출 보려고 왔는데......"
"어제 올라간 사람들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일출도 못 보고 내려온 사람도 있어요."
주인장은 어제의 노고단 일출 등반 실시간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바람 소리가 세차고 몸을 주체할 수 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사람들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다시 오라는 신호지요. 한번 더 오시고 이번에는 포기하세요. 그냥 아침 일찍 등반하세요."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고 노고단 일출은 단념했다.
아침 5시 40분쯤 일어나서 간단하게 씻고 짐을 정리하여 성삼재 휴게소를 향해 차를 몰았다. 해뜨기 전 지리산 자락 마을의 고요함을 가르고 성삼재에 내리니 바람이 세차서 추웠다. '어제만 해도 여름날 같았는데, 산의 기온은 이토록 차이가 나는구나' 싶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장님 말에 따라 휴게소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몸을 데우고 배를 든든히 한 후 노고단을 향해 걸었다.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사람들 모습을 보니, 겨울옷으로 무장하였다. '역시나 산을 좋아하고 산을 아는 사람들은 다르구나', 다음에는 산행 준비를 꼼꼼하게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