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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한 장' 같은 친절이면 충분해요.

by lee나무
오래전 스위스의 한 호텔에서 쪽지 한 장으로도 마음 깊은 곳의 친절을 표현할 수 있음을 배웠다. 호텔 로비에는 언제든 커피와 핫초코를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보온병에 따뜻한 커피와 우유, 초콜릿 가루를 준비해 두었고, 그 곁에는 크루아상도 준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설마 무료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으로 안내문을 자세히 보는데, 그곳에는 "투숙객 모두에게 무료"이며 마음껏 즐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이어트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마음껏 달콤한 디저터의 천국을 경험하라"는 문장이 사람들을 미소 짓게 했다.

-정여울, <가장 좋은 것을 너에게 줄게> 186쪽.



동유럽 여행 중이었다. 늦은 저녁 오스트리아의 어느 시골 숙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행의 피로에 너덜너덜해져서 외국인 주인장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로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늦은 허기가 느껴졌다. 그때 우리가 앉은 소파 바로 앞 테이블 위 빨간 사과가 예쁘게 담긴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그냥 먹어라고 둔 걸까?" 하며 궁금해했다. 우리 모습을 보고 눈치를 챈 듯 주인장은 환하게 웃으며 먹어도 된다는 몸짓을 했다. "이 비싼 사과를 공짜로 주다니!" 하며 하나씩 집어 들고는 기분 좋게 체크인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숙소 뒤 공원을 산책하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1층으로 내려오니 어제의 그 바구니에는 새 사과가 또 가득 채워져 있었다. 투숙객이 언제 드나들더라도 사과 한 알의 친절을 맛볼 수 있도록 마음 쓴 주인장을 생각하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친절의 뜻을 찾아보았다. '대하는 태도가 매우 친근하고 다정함',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겹고 고분고분함 또는 그런 태도'라고 정의되어 있다. '친근하고 다정하며 정겹고 고분고분한 태도' 앞에 '매우'라는 부사가 붙어서 부담스럽다. ('고분고분하다'는 낱말에서 '주관 없이 순종적이다'는 통념이 있어 사전을 찾아보니 '공손하고 부드럽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매우'를 빼면 좀 더 편안하고 쉽게 친절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매우 친근하고 매우 다정하고 매우 정겹고 매우 공손하고 매우 부드럽다면, 글쎄 나의 경우 부담스럽다. 넌지시, 슬쩍, 조그맣게, 소소하게, 원색이 아닌 파스텔톤으로, 정여울이 본 '쪽지 한 장' 같으면 충분하다. '저 사람'이 '이 사람'을 생각하고 있음이 느껴진다면 충분하다. '그 마음'이 '이 마음'을 향하고 있음이 느껴진다면 그것으로 딱 좋다.


멀티태스킹 시대에 친절하기란 쉽지 않다. 밥을 먹으면서도, 심지어 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사람을 만나면서도 사이사이 SNS를 확인하고 '좋아요'를 누르느라 시간 내서 만난 '저 마음'을 신경 쓰지 못한다. 그의 친절이, 그의 다정이 고파서 만났으면서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 할 일이 너무 많고 쉴 때도 오롯이 쉬지 못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뭔가 계속해서 해야 할 것은 불안증에 시달린다. 트렌드도 파악해야 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니 마음에 여유가 없다. 모두가 바쁘니 '저 마음'은 고사하고 '이 마음'도 챙기지 못한다. 그러니 아프다. '이 마음'이 허약하니 주변도 허약하게 느껴진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날, 갑자기 전화했는데 "우산 가지고 오라고요. 잠깐만 기다려요!" 하는 아들의 다정한 말. "이거 먹어." 새로 삶은 따끈한 달걀을 내게 건네며 어제의 남은 것을 자신의 몫으로 하면서도 일말의 거리낌 없는, 서툴지만 따뜻한 남편의 배려. 낯선 도시에서 차선 변경을 못해 식은땀 흘리고 있을 때 이쪽 깜빡이를 보고 들어갈 자리를 열어주는 저쪽의 부드러운 마음. 안 와도 된다고 누누이 말했는데도 이쪽의 속엣말을 읽고 병문안 온 저쪽의 정겨움. "읽다가 문득 너가 생각나서"라며 카톡으로 책선물이 날아들 때 느끼는 너의 다정함. 이쪽을 생각하는 저쪽의, 저쪽을 챙기는 이쪽의 친절은 우리를 힘나게 한다. 미소 짓게 하고 살만하게 한다.


우리는 자주 친절이, 다정이, 정겨움이 고프면서 안 그런 척, 까칠한 척한다. 그래봤자 나만 점점 황폐해지는걸. 어차피 우리는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따뜻해지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걸. 나의 좋은 것을 주었는데 되려 내가 더 기뻤던 경험 있지 않는가. 하루 중 어느 때라도 잠깐이면 된다. 24시간 중 5분이면, 그러니까 하루의 0.3% 정도면 가능하다. '이 마음'이 '살만하다 싶었던' , '존중받고 있다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그런 날을 떠올리며 '저 마음'에게 힘이 되는 '마음씀'을 해보면 좋겠다. 다정도 친절도 결심이고 연습이 필요하다. 그 작은 연습은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가 돼서 파문을 일으키고 무수한 동심원을 그리며 호숫가까지 퍼져나갈 테다. 나의 다정이 너의 다정이 되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좀 더 따뜻해질 테다. 좀 더 살만해질 테다.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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