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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년 전 조선본 외국인, 왜 자존심 상한다고 했을까

(서평) 이일수, <옛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by lee나무
IE002357598_STD.jpg ▲장한종-<책가도>(경기도박물관 소장) ⓒ 경기도박물관관련사진보기



옛 그림에는 문외한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식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책 <옛그림에도 사람이 살고있네>의 이일수 작가의 말이 딱 맞다. "오랫동안 전시 기획을 하면서 관람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조선 시대 그림만큼 먼 나라 낯선 이야기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은 바로 나를 향한다.


우리가 조선 그림만이 가진 지적 유희와 감성적 치유를 경험해 볼 기회도 갖지 못하고 멀어진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입시 위주의 공교육 프로그램이 우리의 문 ·사 ·철을 배제한 탓도 크며, 또 우리의 몸과 정신이 서양 문화에 뼛속까지 잠식당한 탓도 있을 것이다. - 6쪽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이 대단하다. 영상에 담긴 K-팝은 물론 한국의 전통 문화와 한국인의 일상에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스스로 한국 문화의 독창성, 고유함, 아름다움을 저평가한 면이 없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어느 때보다 'K' 열풍이 뜨겁다. 최근 글쓰기와 외국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유북(Youbook, 나만의 이야기를 디지털 미니북으로 만들어주는 플랫폼, 13개국 언어로 자동 번역된다고 한다)'이라는 플랫폼을 알게 되었다. 이 곳에 글을 쓸 때는 'K' 가 들어가야 인기를 얻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책에 따르면 우리 옛 그림은 서양화 감상법과 달리 "색, 선, 면, 형상 등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묘사 대상에 담긴 작가의 정신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감상 포인트라는 말씀이다. 작가의 안내에 따라 낯익은, 또 낯선 옛그림을 만나고 그 안에 담긴 사연을 듣는 일은 지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풍부해지는 시간이었다.



한 점, 한 점 따라 읽는 우리 그림




IE003526510_STD.jpg ▲책표지 ⓒ 시공아트관련사진보기


제 1 전시실, '화가의 마음을 따라 거닐다'에서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신윤복, 이암, 강희안, 김홍도, 김정희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림 전체에서 부분으로, 돋보기로 확대하듯 클로즈업하여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니, 그림을 읽고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화가가 살았던 시대와 화가의 내면 세계를 알아가는 것도 큰 공부가 된다.



이암의 <모견도>, 김홍도의 <행상>, 김정희의 <세한도>에 얽힌 이야기도 무척 재밌었지만,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눈과 마음 모두를 사로잡았다. 작품의 실제 크기는 어른의 손바닥 보다 약간 큰 정도라고 하는데, 전달되는 에너지는 깊었다. 붓의 흐름이 거칠고 굵직하며 성근듯 과감한데 바위에 누워 강물을 관조하는 선비의 자세와 표정이 그렇게 한가하고 여유로울 수 없다. 그림에 시선을 두고 있노라면 나 또한 그 풍경 속에서 한없이 한가해지고, 고됨도 물처럼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전속력을 다해 직진으로 내달리는 것도 좋지만, 물처럼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방법은 또 어떨까 싶다. 돌아가는 여정은 많이 느리고 오래 걸리겠지만 인생의 여러 풍경이 다 가슴에 남을 것이다. 다리는 더 튼튼해질 것이고 마음도 더 단단해질 것이다. - 44쪽


그림은 아니지만 420여 년 전 죽은 남편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넣었던 <원이 엄마의 편지>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삼 껍질과 원이 엄마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카락으로 꼬아 만든 '미투리'도 부장품으로 발견되었는데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도 소개되었다).


제 2 전시실, '옛 그림, 세상에 말을 건네다'에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현재 일본 덴리 대학 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009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9일 간 전시하면서 일본에서 빌려 온 적이 있다. 그때 사람들이 <몽유도원도>를 보겠다고 3시간 이상 줄을 서서 1분 관람했단다. 애통한 일이다). 조선 무신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김희겸의 <석천한유도>를 비롯해 윤두서의 <자화상>, 영조 대왕의 청년기 초상화인 <연잉군 초상>과 재위 20년을 맞이하는 51세 영조의 초상화인 <영조 어진>을 만날 수 있다.


그림 속에는 혼란했던 붕당 정치, 신분 사회의 모순 속에서 때로는 체념하고 때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저항하며 시대를 처연하게 살아낸 조선의 화가들이 있다. 그들의 고뇌가 아팠다. 그럼에도 꼿꼿하게 살아낸 그들의 정신 세계를 만나는 것은 우리 조상의 원형을 뵌 듯 반갑기도 했다.



책을 사랑한 조선 사람들



제 3 전시실, '옛 그림에서 인생을 만나다'에서는 신사임당, 조선의 책 읽는 여인을 그린 윤덕희, 꽃과 나비를 그린 남계우, 김홍도의 부채 그림, 장한종의 <책가도>, 조선의 기생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신윤복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윤덕희의 <책 읽는 여인>과 조선의 서재 풍경을 담은 장한종의 <책가도>가 신선했다.



<책가도>가 탄생한 데는 정조의 역할이 컸다. 정조는 집무실인 창덕궁 선정전 어좌 뒤에 있는 <일월오악도> 병풍을 빼고 <책가도> 병풍을 설치하라고 명했다. '힘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문에 의한 문치주의를 표방한' 왕의 정치 철학이 <책가도>에 담겼다는 설명이다.



1866년 병인양요에 참전했던 프랑스 해군이자 화가인 앙리 쥐베르가 조선을 다녀간 후 <조선 원정기>에 이와 같은 내용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곳(조선)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 331쪽


우리 조상들의 책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된 수를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20건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1위이다. (세계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산의 종류가 많은 중국이 15건, 일본은 7건이니 당시 프랑스 해군 앙리 쥐베르가 놀랄만하다.



'옛 것을 앎으로써 새 것을 안다'는 말의 뜻을 생각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는 말도 다시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 는 말도 새삼 수긍하게 된다. 작가의 말씀처럼 "사랑받아 마땅한 훌륭한 작품들"을 감상하는 호사를 권한다.


https://omn.kr/2ff3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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