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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Apr 16. 2020

바람 피우는 남자와의 연애

그게 연애가 되냐고? 되나 싶어서 만나본다.





남자친구가 나를 두고 다른 여자와 잠을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다섯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이 글을 쓴다. 머리가 아주 어지러울 때, 자꾸만 나쁜 생각이 들고 깊은 우울의 동굴로 빠져들 것만 같을 때, 사람들은 다들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그 시리고 통렬한 고통을 더욱 생생히 느끼기 위해 자기만의 습관을 만들어 놓았다. 누군가는 매일 밤 술에 취하고, 또 누군가는 혼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아주 슬픈 영화를 보며 침대에서 통곡하기도 한다. 이별하고 듣는 노래 모음, 일명 이별 플레이리스트가 생기는 것이 개중 제일 흔한 현상일 것이다. (참고로 필자의 베스트는 이승기의 ‘삭제’다.) 나는 숨이 턱 막히는 어두운 신호가 온다 싶으면 벌떡 일어나 운동복을 갖춰 입고 나가 동네를 쉼 없이 뛴다. 매일 즐길 수 있는 건강한 조깅이 아니라 뒤에 누군가 쫓아온다 생각하고서 죽을 듯이 달리는 것이다. 호흡이나 박자를 생각하지 않고서 다리가 찢어져라 내딛으며 달리다 보면 옆구리가 찢어질 듯 아프고 숨이 너무 가빠서 어지러워진다. 그렇게 더이상 한 발자국도 더 못 가겠다 싶을 때까지 뛰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면 머릿속이 명쾌해진다. 지금은 밖에 나가 뛸 수 없는 여건이라 대신 노트북 앞에 앉았다.


남자친구는 이전에 나에게 거짓말을 한 번 한 적이 있다. 그 거짓을 알고 나서 나는 무지막지하게 화를 내었고, 알고 있는 온갖 쌍욕을 퍼붓고, 뺨을 아주 세게 여러 차례 갈겼다. 그냥 차갑게 뒤돌지 않고 그렇게나 화를 낸 이유는 그를 용서하기 위함이었다. 내 욕지거리와 충고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무릎까지 겸허히 꿇은 채로 뺨을 내민 그를 보니 실제로 마음이 풀리고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 이후에 우리는 놀랍게도 더 가까워졌고, 더 편해졌고,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남들이 알면 그 꼴을 다 보고 왜 만나냐 싶겠지만, 나는 엉망진창인 면도 아주 좋은 면도 있는 사랑을 우리 부모님을 보고 배웠고, 서로가 망가지는 모습조차도 받아들이고 지지고 볶고 싸우고 또 용서하고, 그렇게 한 사람의 양극을 모두 사랑하는 것을 참사랑이라 여기고 꿈꾸며 살아왔던 터였다. 아직 스물다섯 살 어린 나이지만, 나 사랑 꽤나 해 봤다. 여자는 누구를 만나 사랑해야 하는가? 나를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 능력있고 매너있는 사람? 영앤리치 톨앤핸썸이라는 신조어는 이미 유행을 넘어 이상적인 연애 상대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내가 느낀 바, 여자는 자기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해야 한다. 나는 이 사람을 진정 사랑했고, 또 우리 앞에 어떤 시련과 고난과 싸움과 권태가 있어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비슷한 것도 가지고 있었다. 


서너 달 남짓의 짧은 만남을 가져오면서, 이 사람은 나에게 큰 사랑과 믿음을 주었지만, 나에게서 같은 양의 그것을 받아 만족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것이 항상 미안해서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애정표현을 그와 나누려 노력했다. 머리만 대면 잘 자는 그와 달리 나는 항상 불면에 시달려서, 같이 밤을 보내는 날엔 그가 먼저 잠들고 나는 밤 시간에 내 할일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다섯 시간 전에도 쿨쿨 잘 자는 그의 옆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문득 그의 핸드폰을 한번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을 좀 하다 핸드폰을 들었고, 수상한 문자 메세지를 발견하였고,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그가 나를 만나며 다른 여자들을 만나 잠을 잤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바로 그를 깨웠고 화를 내며 내 짐을 챙겼다. 그 집에 있던 값나가는 컴퓨터며 카메라들을 몇 개 때려부시고 싶었지만 칫솔 따위나 집어 던지고 집을 나왔다. 가방 두 개에 자전거 한 대는 새벽에 지하철 두 정거장이 되는 우리 집까지 끌고 가기가 너무 버거워, 나는 일층 분리수거대 쯤 바닥에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숨을 골랐다. 어지러울 만큼 몸이 떨렸다. 나는 별것 아닌 일로도 잘 웃지만 화도 잘 내고 날카롭게 내 할 말을 잘 하고 생각 정리도 빠른 사람이다. 바싹 마른 목구멍으로 빨려들어온 담배 연기가 칼날처럼 몸속을 긁었다. 생각 정리는 되는데 감정 정리가 안 되고 있다. 나오기 전 쥐어뜯은 그의 머리카락 뭉치가 손바닥에서 떨어졌다. 아팠을 그의 머리통이 걱정되어 나는 자전거를 자물쇠도 안 채운 채 그대로 두고 다시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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