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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딸아이가 항상 내게 하는 말

by 자향자

조금 이른 또는 뒤늦은 퇴근 후, 집에 들어서면 할머니 앞에서 환하게 웃는 아이가 부부를 반긴다. 하루의 스트레스가 단숨에 잊히는 이 느낌. 언제나 반갑기만 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조금 숨을 돌리기도 전에 아이가 내게 늘 건네는 한 마디가 있다.


"나랑 인형놀이 할래?"

" 응, 당연히 좋아!"


꾸잉꾸잉이라는 딸아이의 애착인형과 그날 기분에 따라 내게 건네는 수많은 인형 중의 하나가 그날 저녁의 대미를 장식한다. 첫마디는 언제나 아빠의 개시로 시작된다.


"안녕! 나는 토끼라고 해, 네 이름은 뭐니?"

"난 꾸잉꾸잉이야."

"너는 몇 살이니?"

"나는 네 살이야."


세보진 않았어도 아마 수백 번은 더 했을 이 대화 패턴에 아이는 여전히 질려하는 기색조차 없다. 스마트폰 앱 알림장에서 아이의 어린이집에서의 활동 모습을 지켜보긴 하지만 김 빠진 사이다를 마시듯, 부족한 아이와의 부족한 활동을 충족할 수 있는 아이와 나의 유일한 시간.



둘째가 있었으면, 이러지 않았을까 싶고 현실과 타협하며, 동생을 만들어주지 못한 미안함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집안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딸아이는 이제 부부보다 할머니와 있는 시간이 더욱 익숙하다.



어릴 적 내가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많았듯, 아이도 이제는 조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에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 육아휴직을 할 때는 아이에 대해 너무도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지만, 복직한 그 어느샌가부터 나보다 아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할머니에게 때론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일과 후 짧은 1~2시간 동안 진심을 다해 아이와 놀아주는 것 그뿐이다. 인형을 한 손에 들고, 침대에서 방방 뛰기도 하고 함께 숨바꼭질도 하며, 하루 내 부모를 그리워했을 아이를 조금이나마 달래 본다.



어느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들에 관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학대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부모를 찾더라. 그것도 부모라고 말이지. 티 없이 맑은 아이의 생각에 부모는 유일한 안식처이며, 영원한 천국이다.



그렇게 무서운 호랑이 아버지였지만, 그 어렸을 적에도 나는 이버지가 항상 보고 싶었다. 아무 말이 없어도, 주말에 낮잠만 쿨쿨 잤어도 그저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어린 내게 위안이 됐다. 애석하게도 조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정확히 대체할 순 없다.



나도 그랬고, 아이도 그렇고 본능적으로 부모를 찾는다. 아이에게 결국엔 부모가 전부다. 인간계 최약체 아기였던 아이는 이제 제법 쑥쑥 자라,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모험을 즐기는 아이로 성장해나가고 있다. "나 언니야!"라고 외쳐대는 아이의 말에 늘 웃음을 짓긴 한다지만.



이 아이는 과연 나와 언제까지 인형놀이를 계속할 수 있을까? 친구들 만나러 간다며, 부모를 등에 지고 나가는 날도 언젠가 다가오겠지. 내가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조숙한 아이들도 많다고들 하니 말이다.



인생에 수없이 많은 후회가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후회 없는 시간 보내려 한다. 아이가 내게 넘치는 사랑을 주었듯, 부부 또한 그녀에게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보려 한다. 사랑한다. 내 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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