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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처음, 광화문 가던 날

by 자향자

여러분의 인생에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한 적, 그 언제였던가? 혹시 기억나는가?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살아온 이라면, 질문 자체가 의미 없을 수 있겠다만, 나와 같이 경기도에 살거나 지방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언젠가 생애 첫 서울 방문을 한 일은 꽤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경기도에서 태어나 30년 이상 수원에서 살았다. 어릴 적에는 수원을 벗어나 홀로 어딘가로 가본다는 일은 사실 한 번도 상상본 적 없었다. 서울 어딘가 살고 있는 지인을 만나러 한번 즈음은 가본 적 있겠다 싶지만, 내 기억엔 전무하다.



그렇다면, 내 생애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했던 기억은 그 언제였을까? 그리고 그곳은 어디였을까?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의 일이었다. 그 어느 날이었을까? 부모님께서 우리 형제 내외에게 미국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하셨다. 갑자기 왠 미국 여행 이야기를 꺼내게 되셨던 걸까?



그 당시, 이모부 가족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무원이었던 이모부가 정부에서 추진하는 유학 프로그램에 발탁돼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을 기회 삼아 친척들도 보고 여행도 할 요령이었던 것이었다. 더불어 외할머니가 지나가며 하는 말로 "이모가 보고 싶다"라는 한 두 마디 또한 아마 부모님의 미국 여행 결심에 불씨를 지피지 않았을까 싶다.



아메리칸드림. 도전적이고 열정이 넘치는 나라 미국. 바로 이곳에 부모님께서 우리네 형제에게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 일에 우리 형제는 굉장한 흥분감에 휩싸였다. 실로 굉장한 기회였음은 분명했다. 당시, 17살밖에 되지 않은 내가 얼마나 설레었을지 머릿속으로 그려지지 않는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입국하기 위한 절차는 까다로웠다. 입국을 위해 보유 재산 증명을 해야 하기도 하고 비자 신청을 위해 별도로 대사관에서 인터뷰를 거쳐야 하기도 했다. 대체 무슨 인터뷰를 말하는 것일까? 방문 목적 등에 대한 취조에 가까운 면접이 진행된다는 소리였다. 인터뷰 결과에 따라 미국 입국이 좌우되는 중요한 절차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돈 내고 내가 간다는데, 인터뷰까지 거쳐야 한다는 게 참 웃기는 소리지만, 그 당시엔 생각이 달랐다. 두려움이 앞섰다. 말 한마디 못하는 내게 주어진 영어 인터뷰 임수가 꽤나 부담스러웠던 것. 십여 년 간 책으로만 단지 영어를 공부했을 뿐이지, 뱉어본 적은 사실 전무했었다.



한국말로 인터뷰를 하면 통역을 해준다는 말이 다소 위안이 되긴 했지만, 내성적인 내가 면접자의 질문에 똑바로 대답할 수 있을 지도 사실 의문이었고, 행여나 인터뷰에 통과하지 못해 나 홀로 미국에 가지 못하는 건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렇게 2002년 여름 즈음, 광화문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에 가기 위해 나 홀로 서울로 향했다. 그 시절이 아마가 내가 제 발로 처음 서울에 가게 된 날로 기억한다. 당시 아버지는 어디에 있었을까? 당연히 회사에 있었다. 망할 놈의 회사 업무 때문에 큰아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대사관 현장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홀로 난생처음 가보는 서울의 어느 곳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수원역에서 1호선 지하철을 타고 한참을 갔다가 보라색 5호선 지하철을 타는 여정. 마치 취업 면접을 앞둔 것처럼 당시의 나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휩싸였다. '내게 무슨 질문을 할까?', '질문이 막히면 어떡하지?'와 같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면접 시에는 복장이 중요하다. 상대방에게 괜찮은 이미지를 각인시켜야 하니 말이다. 그럼 나는 어떤 복장으로 대사관을 방문했을까? 국방색 무늬가 돋보이며 마치 군복과 같아 보여, 수원 내 고등학교에서도 최악의 교복이라고 손꼽히던 학교 교복. 그 교복을 입고 대사관 면접에 임한다.



메타의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 조차 옷차림은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방식이라고 말했건만, 반삭발을 한 채, 국방색 교복을 입고 대사관에 나타난 면접관은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래서 면접은 어떻게 진행됐냐고? 망했다. 대사관 직원의 어떤 질문에 제대로 말려들어 어중이떠중이 답변을 하게 된 것이었다.



대사관 직원에게 건넨 서류를 그가 받아들이면 입국 심사 통과, 다시 돌려받게 되면 입국 심사 거절이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서류를 돌려받는다. 맞다. 미국 입국 심사가 거절됐다. 충격이었다. 우리 가족 전부 미국에 가게 됐는데, 나 홀로 갈 수 없게 됐다.



인터뷰가 끝나고 아버지와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근처 삼계탕 집을 방문했다. 애써 괜찮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삼계탕은 맛있었다. 그 후에 나는 어떻게 됐을까? 나만 홀로 남겨두고 가족들 전부 훨훨 미국으로 날아갔을까? 아니면 나를 위해 모든 가족이 미국 여행을 취소했을까? 둘 다 아니다.



일련의 소명 절차를 통해 미국 입국 심사에 극적으로 통과된다. 스스로 '고진감래'형 인간이라 칭한다. 인생이 정말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중 하나의 에피소드가 미국 여행을 준비하면서 있었던 일일 것이다.



만약, 인생이 내 맘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해 보자. 단 한 번의 실패와 낙오 없이 승승장구만 하는 여러분을 상상해 보라. 과연 재미있을까? 17세 고등학교 1학년 생이 홀로 서울행 지하철에 몸을 실은 사연과 같이, 미국 입국 심사에서 거절당했다가 기적으로 구제된 사연과 같이 때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도 의미 있지 않은가?



부서지고 넘어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 딛고 일어서야 한다. 바로 그때 여러분과 나는 더욱 날렵한 인생을 살아낼 것이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과정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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