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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버스타고 강남역을 갑니다

by 자향자

영어 교육의 메카 하면 어디가 떠오르는가? 나는 1초의 머뭇거림 없이 강남역이 떠오른다. 지금에야 모르겠다만, 2010년대 초반만 해도, 강남역 모 영어학원이 그렇게나 인기였다. 해당 학원은 현재 영어 분야에만 국한하지 않고, 공무원, 여러 자격증 시험 등까지 발을 넓혀, 교육 사업을 진행 중이다.



군 제대 후 3학년 2학기부터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군대를 다녀온 직후라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다. '나 취업할 곳 하나 없겠어?', '열심히 하면 무조건 되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당시, 취업을 위해 토익은 물론이거니와 말하기 관련 자격증 취득도 붐이 일어났었다. 익히 들 알고 있는 토익스피킹이나 OPIC 자격증이었다. 출제자가 질문을 던지면, 답변을 제출하는 형태의 시험. 문제지를 보고 OMR카드에 마킹하는 일이야,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평생 눈으로만 공부해 본 영어를 직접 말해야 한다는 게 내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큰 고민 없이 강남역에 위치한 모 학원에 등록했다. 당시 집 앞에서 강남역까지 도달하는 광역버스가 있기도 했고, 대학교 앞에서도 곧장 강남으로 직행하는 버스까지 있었으니, 큰 고민은 없었다. 게다가 영어를 제일 잘 가르치는 학원이라는데 당연히 그곳에서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매주 2~3회 남짓, 토익스피킹 자격증 취득을 위해 강남역을 들락날락했다. 나는 주로 느지막한 시간에 수업을 듣곤 했는데, 사람이 많은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원에 가면 항상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행여나 나를 발표라도 시킬까 두려웠고, 수줍은 성격이었기에 내 자리는 늘 맨 뒷자리 아니면 그 앞 줄이었다.



그럼 광역버스 타고 강남역에서 항상 영어 공부만 했을까? 그건 아니었다. 학원은 물론이거니와, 면접 스터디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인과의 약속이 있었다. 강남역은 내게 그런 곳이었다. 이곳에는 수원역 못지않게 내 청춘의 많은 날의 기록이 남아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를 내뱉느라 얼굴이 벌게진 경험도 있고, 때론 지인들과 술 한잔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불야성을 이루는 강남역을 들락날락하기도 했다는 소리다.



강남역으로 향하는 그 시작과 끝에 항상 광역버스가 있었다. 학원에서 깔끔한 답변을 한 어느 날 그리고 모의면접을 훌륭하게 끝낸 날은 기분 좋게 빨간색 광역버스에 올랐고, 취기가 한껏 올라 알딸딸한 날에는 광역버스 맨 뒷 좌석에 앉아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도로 위 가로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취기를 날려 보내곤 했다.



돌아보면 '나는 취업을 할 수 있을까?'라는 잡념이 서서히 몰아치던 시기였기도 했다. 군대를 다녀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자신감이라는 색도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 속과 같은 미래를 두려워하던 청년 하나가 광역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타요라는 만화 혹시 알고 있는가? 버스를 인격화한 애니메이션. 우리 딸이 참 가지고 노는 장난감 중 하나다. 그중 빨간색 버스 캐릭터 하나가 있다. 이름은 '가니' 성실함과 차분한 성격을 지닌 해결사 성격의 캐릭터. 아이가 갖고 노는 빨간색 버스 장난감을 볼 때면, 가끔 그 시절이 떠오른다.



묵묵하게 녀석은 나의 꿈과 미래를 응원하고 있었을 런지 모른다. 성실하게 나를 목적지로 바래다주고, 버스 어느 자리에 앉아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내게 선사했다. 우리네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버스 그리고 지하철. 버스 안에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던 그 시절, 그 순간이 이따금 떠오른다. 그럼에도 가장 기억해야할 것은 그 시절을 이겨낸 나 자신에 대한 믿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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