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백수일지

by 자향자

군 전역 후, 곧바로 복학하게 됐다. 연유인 즉, 얼른 졸업해서 취업하라는 아버지의 독촉 때문이었다. 복학 전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용돈이라도 좀 모아놓을 심산이었던 나의 계획은 그렇게 단번에 틀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판단은 아주 정확했다.)



졸업까지 꽤나 바쁘게 보냈다. 군 입대 전, 개판 오 분 전으로 받아놓은 성적을 메꾸느라 진땀을 뺐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부모님께 송구하지만 1학점 당 무려 10만 원이나 하는 계절학기를 듣고, 학과 시험공부 그리고 취업을 위한 자격증 취득까지 열과 성을 다했다.



졸업 시즌이 다가왔다. 이 시절 나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학교 성적은 가까스로 평균치까지 올려놓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내 딴에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고 취업 자격증 딴다고 분주하게 보냈지만, 어중간한 성적과 함께 뚜렷이 내보일만한 특별함이 없었던 것.



취업에는 자신이 없고, 그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겁쟁이스러운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한 어느 날 나는 부모님께 덜컥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부동산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을까요?"

"대학원? 어디로 가게?"

"동 대학원으로 진학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학비도 저렴하고, 교수님도 좋으셔요."

"그래 알았다."


부모님은 생각보다 쉽게 수긍하셨다. 내 짐작에, 당신께서 강압적으로 편입과 부동산학과로의 진학을 밀어붙였으니, 일종의 사과의 의미로 눈감고 허락해 주신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내가 대학원을 가게 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맞다. 도피성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다. 어느 영화 대사에서 말한 것처럼 비겁한 변명이었다.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쥐꼬리만큼도 없었음에도 취업에 도저히 자신 없어 고민하게 내린 결정이 그저 도망이었다니. 웃기는 소리였다.



그렇게 도망치다시피 진학한 대학원을 나는 무사히 다닐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대학원에서 맺어지는 교수와 학생 간의 끈끈한 관계가 나는 조금 불편했다. 내가 경험한 대학원의 수업은 이러했다. 교수가 간략하게 핵심을 짚어주고 학생 혼자가 깊게 파고드는 공부를 하는 것.



학문에 대해 깊은 이해를 위해 밀도 있게 공부해야 알아들을까 말까 한 것이 대학원의 공부였다. 빠른 결과를 추구하는 나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했을까? 1학기 만에 아버지께 포기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마 나를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쿨하게 "그래, 알았다"라는 말씀을 하셨을 뿐,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그때부터 내 인생에 지옥문이 열었다. 아주 운이 좋게 7개월 간 한 공공기관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 외에 행운의 여신은 더 이상 나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50여 군데 넘게 지원했던 사기업 입사원서는 줄줄이 탈락했고, 그와 중에 면접을 보러 오라고 손을 들어준 곳은 단 한 곳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떨어졌지만.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조금씩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내일부터 달라져야지' 하는 마음은 다음 날 아침, 늦잠으로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기 일쑤였고, 이력서 쓴다는 핑계로 하세월을 보낸 시간만 2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한 살 터울 내 동생은 졸업을 하자마자, 내로라하는 공기업에 취업이 되었으니, 나도 나지만 부모님께서 나를 얼마나 안타까워하셨을지 부모가 되어보니 아주 조금은 느낄 수 있을 법도 하다. 나는 그렇게 서서히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 나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평생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살지 않았을까 싶다. 그 당시의 나는 쓰레기였다.



미국의 방송인이자 사업가로 명성을 떨친 지미딘은 이런 말을 했다."바람의 방향은 바꿀 수 없지만, 돛을 조정하여 항상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라고. 변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명언은 내 인생에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을까? 나는 변화가 되긴 했을까? 그 변화의 시작은 또다시 아버지의 말 한마디로부터 시작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빨간 버스타고 강남역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