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개월간의 동반 육아휴직을 마치고 다시 회사로 돌아오던 날,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회사에 휘둘리는 삶은 이제 그만. 가족 중심의 삶을 살겠다.’ 그 당시의 다짐은 꽤 단단했고, 나름대로 멋져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늘 그 다짐을 시험하곤 한다.
10년 차 공무원이 되면서 내게 새로운 역할이 하나 생겼다. 팀장과 팀원 사이에서 조율해야 하는 중간의 중간자 자리에 위치하게 된 것. ‘솔선수범’이라는 단어를 되새길 수밖에 없는 위치다. 솔선수범. 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
내성적인 성격 덕에, 팀 내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 성격은 아니다. 다만, 팀장의 오더에 시의적절하게 반응하고, 모르는 업무를 앞에 두고 팀원들 앞에서 최대한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지내야 하는 것도 중간의 중간자로써의 역할 중 하나다.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하루하루를 버텨낸다고 나 할까. 이런 역할을 해온 지도 어느덧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조금씩 늦은 귀가가 당연해지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사용하던 '육아시간'도 언제부턴가 당연스럽지 않아 졌다. 야근은 잦아지며, 다시 나 그리고 가족은 점점 멀어져 가는 것만 같다. (사실 멀어지고 있다.)
지난주 목요일과 금요일엔, 내년도 '2026년 업무 계획 수립과 예산 편성'으로 머리가 지끈 거리는 시간을 보냈다.
그게 뭐 그리 부담스러운 일이냐고 묻는 이들에겐 할 말이 없다만, 졸보 성격을 지니고 숫자를 통 어려워하는 내겐 다른 업무보다 두 배, 세 배 어렵게 다가온다. 다들 알다시피 수정도 무한반복되지 않는가. 이 와중에 아이가 열이 많이 오른 밤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나 대신 아내는 하루 휴가를 냈다. (생각해 보니 아내도 바빴을 게다.)
복직 전 외쳤던 ‘가족 중심의 삶’은 또다시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이의 열이 오른 그날 밤, 아이 이마에 손을 얹으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내가 지키고 싶었던 삶은 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 끊임없이 일을 부여한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일만 하라고 한다. 궁지에 몰리고, 사지로 밀려날 때, 사람은 이성을 잃는다. 그리고 그제야 후회라는 감정이 밀려온다. 이 반복되는 패턴이 싫어, 나는 조금씩 세상에 나란 사람을 알리기 시작했다.
여러 SNS 플랫폼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공개하기 시작힌 것. (여전히 미진하다.) 거창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는 아니지만, 그저 삶을 기록하고, 나의 기록을 이름 모를 누군가가 확인하고 소통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재미있다.
글을 쓰는 일은 나를 정리하는 일이다. 정제되지 않은 문장 속에서 진짜 나를 발견하고, 실수를 통해 배워가는 것도 너무나 많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회사와 가정의 양립은 정말 불가능한 이야기일까. 연차가 쌓일수록, 가정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나를 발견한다.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수긍하게 된다. 이대로 수긍하는 건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우리네 직장인들은 지하철에 몸을 싣지 않는가.
과연 나는 내 인생을 가족 중심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마음먹은 일들을 끝까지 발현시킬 수 있을까. 어쩌면 균형이란, 완벽한 비율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메타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말한다. “가장 큰 위험은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 도전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어쩌면 도전할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는, 바로 ‘나를 믿기 시작한 순간’ 일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매사에 의심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그런 나와 우리가 되길 바라본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조금 불안하고, 여전히 흔들리지만 다시 한번 나를 믿고 용기 내 한 걸음 내디뎌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