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한 지 9년이 지난 공무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업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민원' 업무입니다. 공무원도 사람인지라 민원 발생이 많은 부서를 당연히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속을 주로 하는 교통 단속이나 불법 광고물 등 과태료를 부과하는 업무를 하는 부서는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기피하는 부서입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업무이기도 하지만 같은 월급에 민원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강도 높은 업무를 한다고 가정하면 손해 본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니까요. (저도 당연히 하기 싫습니다.)
여담으로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공무원이라면 시군구청보다 읍면동사무소에서 근무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일단 민원 업무의 난도와 강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기 때문일 거라 추정합니다. 동사무소 업무를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고 다만 주변 공무원들에게 구청 갈래? 동사무소 갈래? 하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동사무소를 선호하더라고요. (저도 그렇습니다.)
하여튼 복직을 하면서 상기에 언급한 부서가 아닌 곳으로 배치를 받게 됐습니다. 속으로 내심 쾌제를 불렀죠. 그래도 '민원이 좀 덜한 곳에서 일을 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근데 그건 저의 굉장한 착각이었습니다. 복직하는 날 당일에 이틀 뒤 민원인이 방문한다는 인수인계서를 전달받게 됐으니까요. 어떤 민원이길래 오죽했으면 인수인계서에까지 적어놓았을까 싶었습니다.
민원이라는 건 뭔가를 반대하는 의견이 주를 이룹니다. 공무원 조직에서 '반대'와 '민원'이라는 단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 보고 있어요. 인수인계서에는 'OO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방문할 예정'이라고 기재돼 있었고 글을 읽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일단 업무도 잘 모르고 어떤 민원인지 들어는 봐야 하니까요. 이튿날이 됐습니다. 다양한 계층의 민원인이 한데 모여 본인의 의견을 개진합니다.
'주민의 의견이 이렇게 다양하구나.' 이런 생각과 함께 '아. 여기 쉬운 곳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민원이 조금 덜한 편이긴 한데 한번 민원이 오면 강도가 무지하게 세다. 원투 잽잽으로 민원이 발생하는 게 아니라 묵직한 어퍼컷 한방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 제가 복직한 부서였습니다.
공무원은 주민의 의견을 웬만하면 무시하지 않습니다. 민원의 소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민원인이 제시한 중요한 포인트는 개인 수첩에 적어놓거나 메모를 해놓고 불씨가 타오르지 않도록 최대한 소화시키는 편입니다. 직접 해결을 해주기도 하고 당장 가시적인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이해설득을 하는 방법으로 민원을 진정시킵니다. 그래야 일이 커질 우려도 없어지고 향후 본인이 피곤해질 일도 없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2주 정도 지났을 무렵 다시 한번 민원인이 찾아왔습니다. 이번엔 다른 무리들과 함께요. 이해설득으로는 만족이 안 됐었나 봅니다. 지난번과 같이 팀장님도 나서서 열심히 설득을 합니다. 이해설득을 시도할 경우 확률은 50%입니다. '수긍한다.' '이대로 안 넘어간다.' 이번 민원인들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민원인이 열불 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 말 들어보셨죠. "사장 나오라고 해." 공무원 조직에서는 "시장 나오라고 해" 정도가 되겠네요.
이런 상황을 지나 이제 부서장까지 나서는 상황이 됐습니다. 연유는 이랬습니다. 민원인과 제가 만나게 된 자리에서 민원인이 협의되지 않은 정보를 요구합니다. 그중에 개인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실 건가요? 절대 못 줍니다. 법 중에 가장 무서운 법이 '개인정보보호법'이거든요. 굉장히 광범위하고 잘못하면 징계까지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공무원이 미쳤다고 줄까요. 거기에 '녹취'까지 진행한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쉽사리 말 한마디를 내뱉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민원인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일단 첫 번째로 '녹취'를 하고요, 이것도 잘 안되면 '사장 나오라고 합니다.' 사장님은 항상 바쁘신데 말이죠. 어쨌든 다음 높은 사람인 부서장과 만나게 됐습니다. 민원인을 만난 부서장은 해당 민원인에게 원하는 정보가 있다면 절차를 거쳐 청구하라고 안내합니다. 더 이상의 진척 없이 아주 깔끔하게 처리하게 됩니다. (솔직히 좀 멋있더라고요.)
씩씩거리며 가는 민원인은 실무자인 제게 두 가지 선물을 전달하고 갔습니다. '정보공개청구' 그리고 '사장님과의 면담'일정 말입니다. 두 가지 모두 공무원에게는 까다로운 난제입니다. 최종 보스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자료를 만들어야 하고 민원인과 통화도 해야 하고 자료도 따로 작성해 보내줘야 합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9년 차에 접어든 저도 정보공개청구나 사장과의 면담 두 가지를 동시에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민원인이 있지도 않았었고요. 이번에 제대로 걸렸습니다. 사장에게 보고가 들어가는 상황이 되면 일단 본 업무를 제하고 민원 해결을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회사 간판인 사장이 주민과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답변 한 마디에 신중을 기해야하기 때문에 자료 또한 철저하게 만들어져야 합니다. 강성 민원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겠고요.
본업 제처 두고 일주일 내내 해당 자료만 만들었습니다. 초안을 만들고 팀장에게 보고하고 수정하고 재수정하 고를 몇 차례하고 부서장에게 보고하게 됩니다. 부서장도 당연히 부가되었으면 하는 정보가 있습니다. 다시 수정합니다. 재수정하고요. 일주일은 정말 거짓말 조금 더 보태서 백데이터만 만들다가 끝났습니다. 그럼 본업은 언제 할까요? 틈날 때마다 하기도 하고 그것도 안되면 초과근무하면서 하는 겁니다.
그렇게 사장이 답변할 자료가 최종적으로 만들어지고 당일 '사장과 주민의 면담' 시간이 드디어 열렸습니다. 이것만 하면 끝이 나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당일 사장과의 면담 자리에 관련 민원에 대한 의견 개진을 위해 20여 명이 자리했습니다. 엄청난 숫자고 생각지도 못했던 인원이었습니다. 사장과 주민 간의 면담 자리에는 서로 마주 앉아 답변을 주고받고 사장 옆에 과장 팀장급이 배석되어 보조를 맞추게 됩니다. 실무자는 가장 바깥에 앉아있게 되고요.
주민은 사장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게 됩니다. 사장은 개략적인 부분에 대한 이해는 있지만 지엽적인 부분까지는 알기 쉽진 않습니다. 챙겨야 할 업무가 정말 많잖아요. 강성 민원인의 특징은 답변이 미진한 부분을 물고 늘어진다는 겁니다. 굉장히 집요하게요. 사람의 원초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자리가 이런 자리가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보통 사장과의 면담은 30분 정도의 시간을 잡고 면담을 진행하게 되는데 그렇게 두 시간을 면담했습니다. 이날 내줄 수 있는 부분은 내어주고 중립을 취할 부분은 취했습니다. (차후 물고 늘어지는 민원 덕에 조금 더 고생하긴 했지만요.) 저는 이 날 조금 공무원 조직에서 희망을 봤습니다. 사장이 직원을 생각하는 모습을 조금 엿볼 수 있었거든요. 백데이터 만드느라고 입 나오면서 정말 고생해서 만들었는데 답변에서 직원을 생각하는 모습이 묻어 나오는 부분이 있어서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만약에 사장이 직원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그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그 조직은 지속적으로 발전하리라 봅니다. '사장도 이런 마음이구나. 주민 편만 드는 건 아니네.'라는 마음을 제가 전달받았거든요. 완전한 주인 의식을 가진다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마음에 위안을 받은 느낌입니다.
민원이 발생하면 공무원은 문제 해결을 위해 돌진합니다. 본인이 피곤하기도 하고요, 민원인에게도 해결안을 제시해 주기 위함도 있겠습니다. 주민 모두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중립적으로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공무원들에게 '민원'은 항상 어려운 난제입니다. 찬성이 있다면 반대가 있고 불만이 있으면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주민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공무원 개인적으로도 업무 처리가 깔끔하지 않을 경우 찜찜한 마음이 남아있고 미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피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방법을 도출하고자 하는 공무원들도 있다는 점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