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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남이 Aug 19. 2024

사실 죄송할 이유는 없다

공무원 생활을 하며 굳어진 말투 하나가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민원인에게 언제나 사용하게 문장 중 하나이고 사내 윗사람들에게 보고할 때도 늘 입에서 맴도는 첫 문장이기도 합니다. 제가 내뱉는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에는 '한 수 접고 들어가겠다'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기도 하고 '배려를 바란다'라는 의미 또한 담겨있습니다. 이제는 공무원 생활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사용도 높은 문장 중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죄송합니다.'라는 문장에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담을 때도 있고 무의식 중에 기계적으로 내뱉는  순간도 있습니다. 이제 제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후자에 무게 추가 더 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해당 문장뿐만 아니라 회사에서 늘 사용하지만 진심이 아닌 진심을 담는 문장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팀장에게 보고할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 자료를 다듬고 어떻게 말을 전달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한 후 보고를 하러 갔습니다. 머릿속은 '이러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였고요. 제 입장에서는 팀장은 아무래도 과장(사기업에서는 부장급)보다는 훨씬 편하게 다가갈 수 있기에 어렵긴 하지만 그나마 여러 문제들을 툭 터 놓고 꺼낼 수 있는 상급자입니다.



하여튼 팀장에게 보고를 하러 가서 제가 내뱉은 첫마디는 뭐였을까요? "늦게 보고 드려 죄송합니다." 제 머릿속에 애당초 있지도 않았던 문장 하나가 반사적으로 나왔습니다. 크게 중요한 사안도 아니고 기한을 다투는 시급한 사안이 아닌 그저 그런 일상적인 보고건이 있던 탓에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보고 아닌 보고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 지금 뭐 하냐. 쫄보 기질 어디 안가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죄송하단 말을 내뱉은 거야.' 하고 말입니다.



내성적인 성격과 보수적인 행동 성향 탓에 스스로를 낮추는 말과 배려하는 말들을 아낌없이 사용해 왔던 저였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회사에서도 동료들과 대화를 할 적에는 물론이고 상사에게까지 이런 식의 멘트를 늘 사용해 왔습니다. 제 개인적인 성향은 번외로 하고 조직에서는 이런 성향의 직원을 굉장히 선호합니다. 업무에 대해 반기를 드는 일은 전혀 없을 것이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직원일 확률이 굉장히 높기 때문이죠.



일반 사기업에서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공무원 조직에서는 알 수 없는 '겸손의 미덕'을 요하는 경우가 꽤 많이 있습니다. 연공서열에 따른 조직 문화가 있어서인지 몰라도 튀어 보이는 행동하는 직원을 그렇게 선호하는 편은 아닙니다. 이 조직은 최대한 안전하고 사건사고 없이 일을 진행하는 게 최선의 목표니까요. 저도 공무원 생활을 해오면서 '겸손의 미덕'이 9년 간의 회사 생활 중에 알게 모르게 자리 잡혀갔겠지 싶었습니다.



공무원 조직은 각 직급에 맞는 행동의 한계선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서열이 굳건히 자리매김되어 있고, 각 직급에 맞는 말과 행동의 절제를 요합니다. 물론 이를 대놓고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는 못했지만 눈치를 보면서 자연스레 공무원 사회를 습득하게 됩니다. 근래 들어 저연차 공무원들의 이탈이 많아지면서 조금씩 유연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입니다.



어쨌든 저 또한 이런 딱딱한 조직 문화에 직급에 맞는 언어와 행동을 해왔던 게 아닌지 싶었습니다. 죄송한 게 없는데 죄송하다고 말한다. 죄송한 이유는 늦게 보고해서이고.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고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사실 죄송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름 신중을 기해서 자료를 만들었고 오와 열을 맞춰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렇게 보고를 하고 수정할 사항은 반영해서 진행하면 되는 건데 말입니다. 본인의 한계가 여기까지고 본인이 가슴에 손을 얹고 최선을 다했다면 그걸로 되는 겁니다. (잘하려고 할수록 늪에 빠지는 것이 안타깝지만 공무원 조직의 특성입니다.)



국민신문고 등을 통해 들어오는 각종 민원에 대한 답변에서도 민원인에게 항상 양해를 구하는 문장을 말미에 기재합니다. 일반적인 민원 불편사항에 대해 담당 공무원 또한 미흡한 처리에 대한 당연히 미안한 마음을 담아 양해를 구하는 문구를 기재합니다. 그럼 비상식적인 민원이 들어올 경우는 어떨까요? 일단 양해를 구하는 문장을 동일하게 기재합니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이 답변 처리에 대한 미안함이 정말 담겨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앞으로는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같은 인사치레 대신 "보고 드리겠습니다."등과 같은 간결한 문장으로 보고를 끝마치는 연습을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만든 보고서가 형편없거나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 때 꺼내어 사용해 보려고요. 처음부터 실수를 염두에 두고 일을 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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