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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남이 Aug 21. 2024

내가 더 이상 회사에서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 이유

지자체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지방 공무원은 2년 정도 근무를 하게 되면 시군구청이나 읍면동사무소로 이동을 해 '순환근무'를 하게 됩니다. 행정직의 경우 전방위적으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직렬이기에 다른 직렬에 비해 갈 수 있는 부서도 많고 업무의 변경도 꽤나 자주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동사무에서 민원대 업무를 보다가 갑자기 구청으로 발령이 나 전통시장 업무를 맡게 되는 업무를 보기도 하고요, 반대로 구청에서 교통 지도 업무를 맡다가 동사무소로 발령이 나기도 합니다. (일 좀 할 줄 알게 되면 또다시 발령이 나버려 리셋되어버리는 상황의 연속이죠.)



제 경우 동사무소에서 처음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시간이 흘러 구청으로 발령이 나게 됐습니다. 발령 난 곳은 조직 개편으로 인해 생긴 신생 부서였고요. 신생 부서의 경우 보통 시군구청장이 관심을 두고 있는 업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부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새로이 부서 하나가 만들어졌다는 건 그만큼 뭔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이고 신생 부서에 배치받은 공무원들은 업무의 틀을 정형화시켜 향후 연속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부서의 기반을 다져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부서가 새로 생겨나는 경우 사실 주변에 업무를 참고할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공무원 업무가 거기서 거기라고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쉽진 않습니다. 업무 자체가 매우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공무원 조직은 과년도의 업무계획이나 실적 등의 자료를 보고 내용을 조금 덧대 새로이 업무 계획을 세우곤 합니다. '벤치마킹'이라는 미명아래요.



제가 배치받은 부서의 경우 새로 만들어진 부서이다 보니 속된 말로 베낄 수 있는 자료 자체가 없더라고요. 이런 경우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형식으로 다른 시군구에 구걸해서 관련 자료를 받거나 타 부서의 관련 업무를 일부 가져와 업무를 추진하게 됩니다.  여하튼 그렇게 팀이 구성되고 업무 분장도 행해졌습니다. 저는 부서 관련 '행사' 업무를 맡게 됐고요, 이 과정에서 시나 도 같은 상위 기관에서 보조금을 받아 행사를 하는 업무 또한 하나 맡게 됐습니다.



처음 작성해 보는 구청 업무에 방침서(계획서) 하나 작성하는데도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동사무소에서 작성하던 방침서와는 다르게 세부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사항이 있기도 했고, 소요되는 예산도 훨씬 컸으니 쫄보인 제게 부담이 되더라고요. 새로 시작하면 뭐든 어렵게 느껴지곤 하잖아요. 그렇게 고심 끝에 진심을 녹여낸 방침서 하나가 만들어졌습니다.



동사무소와 다르게 구청은 방침의 중요도에 따라서 결제 라인도 더 많아집니다. 예를 들어 동사무소에서는 담당자-팀장-동장으로 결제가 마무리된다고 하면 구청은 담당자-팀장-과장(=동장)-국장-부구청장-구청장까지 이어지는 결제 라인의 연속입니다. 보통 방침 하나를 만들면 국장까지 결재를 득하는 곳이 구청입니다.



그렇게 결재 라인을 국장까지 정하고 '기안' 버튼을 눌렀습니다. 이제 팀장의 검토가 이어집니다. 8,9급 때나 7급인 지금이나 불러가기는 매 한 가지인데요, 이는 팀장이 원하는 바를 케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럴 자신도 이제는 없고요.) 어쨌든 불려 가서 어떤 의도로 기획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분화하지 말고 내용을 한꺼번에 담았으면 좋겠다 등등의 말을 들었습니다. 과연 그런 보고서가 나올 수 있을까요?라고 되묻고 싶을 정도로요.



당시 9급에서 8급으로 막 진급한 시기였기도 하고 자신감도 상당했던 저였는데 구청에서 업무는 생소했습니다. 일단 모르니까요. 배우긴 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한두 번이면 그러려니하는데 계속 그러면 사람이 약이 오릅니다. 일부러 그러나 싶기도 하고요. 나중에는 누가 방침서를 세우는 건지 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렇게 많이 수정하고 바뀌었는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기안자는 제 이름으로 되어있는데 방침서의 내용이나 형식이 제가 기획했던 바와 180도로 다른 방침서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부서장에게까지 올라간 거죠. 물론 보고는 제가 하게 되고요.  솔직히 말하면 그런 생각 들었습니다. '아니 그럴 거면 애초가 자기가 쓰던가.'라고 말이죠. 한참 후배인 실무자의 계획서가 당연히 마음에 안 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기안자의 방침서를 뒤엎는 건 정말 아니지 싶습니다. 조금 더 다른 방향으로 가이드를 제시해 줬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버리면 실무자의 사기가 진짜 많이 꺾이거든요.



실무자의 기획 의도를 담아 작성하는 게 방침서라지만 공무원 조직에서는 상관들의 입맛에 더 잘 맞추는 방침서를 세우는 게 이곳의 국룰입니다. 팀장을 비롯해 부서장의 의견을 조화롭게 녹여내야 하는 일련의 작업이기도 하네요. 만약 팀장과 부서장의 사이가 그저 그렇다면 방침 하나 나오기 정말 힘들겠죠?



여하튼 그래서 그 이후에는 저는 어떻게 됐을까요? 저는 더 이상 제 의견을 개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본 사건뿐만 아니라 그간 벌어진 여러 일들을 비롯해 아무리 실무자가 의견을 개진해도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답정너 사회에서 제가 굳이 머리 싸매고 힘들이면서 지쳐갈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고민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분명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적당히만 하게 만드는 게 바로 이 공무원 사회인 듯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네가 제대로 일 못한 거 아니냐"라고요. 맞아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원래 일을 못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 의견에는 절제를 상관의 의견에는 관대한 방침서를 수립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훨씬 빠르게 진행이 되긴 하더라고요. 사회가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바꾸어 가는 듯합니다. 처음에는 정말 안 그랬었는데 말입니다. 머리 싸매고 고민할 시간에 책 한 장이라도 읽어내며 저만의 시간을 만들어가야겠습니다. 의견은 조직 밖에서 개진하기로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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