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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vin Jan 29. 2016

종이 한 장을 채우다.

[Chapter I]#1. 그래도 한 장은 채운 거야.


고교시절 내내 밤 12시를 넘어 체크 아웃하던 독서실도 수능시험 일주일 전부터는 컨디션 조절을 위해 밤 8시~9시에 귀가하고, 주변 선후배들로부터 합격을 기원하는 엿, 휴지, 사탕 등을 받는다.

 가끔 같은 동네의 몇 살 어린 여학생이 준 롤링페이퍼가 기억이 난다. 그 친구의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들 간에 교류가 있어서 가끔 그 친구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유아복 가게에 들리며 인사 정도만 했었는데, 수능을 얼마 앞두고 역시 직접 전달받은 것도 아니고 어머니 통해서 받은  손바닥만 하게 여러 번 접힌 카드에는 반 친구들의 합격기원 손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고3 선배에게 합격을 기원하는 메시지는 생각보다 건조했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30~40명 정도 인원에게 나를 위한 메시지를 부탁했을 어린 여학생의 마음에 나는 어떤 식으로든 고마움을  표시했어야 했다. 심리적으로 가장 불안했던 시기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웠고, 시간은 그 상황에서 나를  미안함에서 잊혀짐의 순차적인 단계로 가져다주었다. 표현하지 못한 미안함은 온전하게 이 시간까지 나의 몫으로 흐릿하게 남은 채로.


 - 5.3 C


 

  1998년 11월 18일은 영하 5.3도, 수능을 도입한 이래 가장 추웠던 날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그날의 추위보다 무겁게 조여 오는 부담 가득한 기운의 공기가 더욱 시린 통증으로 기억한다.

  벽마다 가스난방기를 틀어놓았지만 냉기 서린 교실에 아무 색이 없는 얼굴을 한 감독관이 들어와 시작을 알리며 시험이 시작한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쥐어짜듯 시간을 겨우겨우 맞추어 문제를 풀었는데, 마지막 외국어영역은 20분 이상 시간이 남았다. 아직도 대부분 학생들은 엎드린 채 지문을 읽고 있다.

 왼쪽의 창 쪽으로 시선을 둘러보았지만 추운 겨울 난방을 가동하는 낡은 교실의 얇은 유리는 두텁게 습기가 차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끝났다!. 끝났어.... 끝난 건가?... 뭐가 끝난 거지...?' 분명히 난 다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일어서지도, 말을 할 수도 없으며, 밖을 볼 수도 없기에 책상으로 고개를 떨구어 아래를 보았다. 


 종이 한 장을 채웠을 뿐이다.


 시험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곳곳에 까맣게 컴퓨터용 펜으로 칠한 누런 종이와 시험지를 제출하고 수험장을  빠져나왔다. 떡볶이 코트에 손을 찔러 넣고 머플러를 칭칭 감은, 이제는 수험생이 아닌 아이들이 운동장에 쏟아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들뜬 목소리들이 들린다.


"으아아아~~~~ 끝났다~~~~~~~~!!!!!!"

"술 마시러 가야지! 수유역으로 가자!"

"아~놔~ 난 집에 가서 잘래~~~"

"야, 삐삐 치면 군소리 말고 나와!ㅋㅋ"


난 운동장에 잠깐 멈추어 섰다. 오후 5시  정도였음에도 날은 꽤 어둡고 흐렸다.  휴대폰은 없었다. 주머니의 호출기를 확인해보았다. 그 당시 혼자 좋아하던 J로부터 너도 수능을 잘 보았냐며, 수능 끝났는데 밥이나 먹자는 연락이 와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 그런 건 없었다.

 그랬다. 멍청하게 연락이 오길 기다리다니.... 먼저 다가가는 법, 표현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반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늘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성당에서도 복사단, 성가대 등 열심히 활동하긴 했지만, 나는 내 의지로 무언가 부단하게 추진해 본 일이 없었다. 중학 3학년 때부터 인문계가 아닌 공업 고등학교를 가서 기계를 만지고 싶었고, 그림을 좋아해서 만화도 그리고 싶었고, 좋아하는 이성도 있었다.

하지만 인문계를 왔고, 만화는 만화책만 열심히 읽었고, 교제하는 이성도 없이 오늘 아까 그 종이 한 장을 채워서  제출한 것이 전부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며칠의 시간을 더 보냈다.


신문배달

당장 뭐라도 해야 겠다해서 생각해 낸 것은 고작 신문배달이었다. 방구석에서 며칠 간 밖을 안 나가서 추위가 오고 있다는 감을 잃기도 했지만 뭐 20세의 피는 충분히 뜨거웠던가 보다. 혹한의 신문배달은 그렇게 시작했다. 

몇 달 전에  그만둔 수학학원 근처에서 보아두었던 중앙일보 지국에 찾아갔다. 허름한 벽돌 건물 2층에 올라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보니 커트한지 3개월도 지난듯한 스포츠머리의 큰 머리의 키 작은 아저씨와 사흘은 굶은 것 같은 늙은 순록의 눈을 가진 아저씨 두 명이 좁은 사무실에 희뿌옇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누구시죠?" 큰 머리 아저씨가 나를 보며 물었다.

"네, 신문배달을 할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아~ 그래요? 학생인가?" 여기까지로 그들의 존칭은 끝.

"네, 얼마 전에 수능 봤어요."

"그래, 오토바이 탈 줄 아니?"

"아니요... 타본 적 없습니다."

"음... 그래 뭐 자전거로 타면 되니까. 자전거는 탈 줄 알지?" 

"네, 뭐 조금..." 모른다고 할 걸 그랬다.

 큰 머리 아저씨는 1층으로 나를 안내하고 곳곳에 녹이 슬고 시커먼 철자전거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이거 타고 집에 갔다가 내일 2시까지 와."

'... 2... 시...? 아침에 하는 거 아니었나?, '


그리고 다음 날,

겨우겨우 1시 30분에 일어나 도무지 무겁기만 한 무쇠 자전거를 타고 다시 그 지국으로 갔다.

 '아놔.... 아무도 없다.' 

도착한 지국엔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길에는 차도 다니지 않았다. 그냥 집으로 올까 하다가 10분 정도 기다리는 중에 눈이 부어 조금 더 머리가 커 보이는 어제 그 큰 머리 아저씨가 나타났다.


" 오 왔구먼 ㅋㅋ 잠깐 기다려봐"


지하 반층을 내려가니 오늘 배달할 신문들이 꽤나 많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나는 광고전단지를 신문에 끼워 넣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4시가 넘어가니 다른 배달원들이 지국으로 도착했고, 그들은 내가 만든 신문을 들고 각자 지역으로 떠났다. 나를 제외한 모든 배달원은 모터사이클을 이용했다.

 


 전단 작업이 끝나자 나는 큰 머리 아저씨가 끄는 오래돼 보이는 모터사이클 뒤에 태워져 내가 배달할 곳을  숙지받았다. 단 이틀 내 구역을  인계받고 메모지에 적은 지도와 빌라 동과 호수를 보며 나 혼자 배달한  첫날은 3시간 30분이 걸렸다. 자전거 앞뒤로 300부가 넘는 신문을 가득 싣고 삐걱삐걱 요란한 자전거 소리로 새벽을 깨우며 내 구역을 열심히 뛰어  배달했다. (속으로 나름 첨밀밀의 여명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그림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재민이가 내일은 본인이 도와 주시겠단다.


" 야, 너는 그 시간에 일어나지도 못해" 내가 좀 빈정거렸다.

" 아니야 인마! 뽀태(당시 내 별명) 네가 이 겨울에  고생하는데 내가 도와줘야지 ㅋㅋㅋ 걱정하지 마!"

" 그래, 그럼 내가 지국에서  신문받아올 테니, 새벽 4시까지 인수 초등학교 앞으로 와라. 뭐 안 나오면 나 혼자 하면 되고."


재민이란 친구는 12시에 같이 농구하자고 하면 3시에 기어 나오는 놈이다. 약속시간 한 시간 뒤에도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집에 가보면 팬티바람으로 잠자고 있는 제3세계 시간관념을 가진 이 녀석이 다음 날 새벽 4시에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도 신기하다. 뭐 녀석도 수능이 끝나고 하는 일 없이 빈둥 거렸을 터, 내가 하는 신문배달이 꽤나 궁금했던 듯하다.


배달의 달인


담장을 넘겨 신문을 던질 땐, 무릎으로 신문을 '팡!'소리가 나게 때려 U자 모양을 만들어 던지기, (이 걸 잘 못하면 신문을 던졌을 때 온통 흐트러지게 되고, 재민이는 몇 부의 신문을 길바닥 쓰레기로 만들었다. 뭐  도움은커녕 수습생 달고 다니는  듯했지만 평소보다 몇 배는 즐거웠다.)

한 손으로 재빨리 신문을 말아서 신문 투입구에 넣기, 자전거를 타고 이동 중에 던지기 등등 그간 습득한 나의 현란한 기술과 빌라 계단에서 능숙한 나의 스텝에 녀석은 놀란 눈치다.


 인수동 언덕 위 끝자락에서 그 날 배달이 끝났다. 그러면 안되지만 며칠째 우유가 쌓인 어느 집을 알고 있던 나는 우유 두 개를 훔쳤다. '주인이 집을 비운 것 같으니 썩어 버리는  것보단 나을 거야.'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재민이에게 선심 쓰듯 호기로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물론 범죄다.)


 한 겨울 새벽의 차가운 흰 우유는 땀으로 젖은 우리의 정신을 확 깨워주었다. 어쨌거나 강렬하게 시원한 우유였다.

 그리고 우리 둘은 자전거에 올라 두 시간 가까이 땀 흘리며 오르락 거리던 언덕 동네를 빠져나와 시원하게 아직 새벽이 걷어지지 않은 검은색 차도로 내달려 내려온다.


 땀에 젖은 얼굴과 목 뒷덜미를 가르던 차갑지만 시원한 바람.

 뭐가 신나는지 계속 시끄러운 친구,

아직도 깜깜하긴 하지만 멀리서 밝아오는 아침. 그 완벽한 아침은 '새벽'이라는 오롯한 시간을 스무 살의 두 명의 친구가 땀 흘리며 함께  해서였을까.



어둡고, 색채가 없는 나의 스무 살은 한 겨울 새벽의 노동으로 시작했다.

수능이란 종이 한 장을 채웠을 뿐이지만 의미가 없지 않았길, 

당신을 향한 내 마음과 글이 낮 찌푸려지는 남루한 고백이 아니길,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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