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

by 정설모

‘누군가 K.를 모략했음이 틀림없다. 결혼식을 한달 앞둔 그녀는 미혼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아침 그녀자신이 이미 누군가와 결혼한 상태임을 알리는 한통의 메일을 받았기 때문이다.’



며칠전 K의 약혼자인 슈테판은 결혼 서류 접수를 위해 시청에 문의했고, 시청 담당자로부터 ‘당신의 약혼녀인 K는 이미 ‘기혼’으로 등록되어있어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이메일을 받고나서, 전날밤 그 메일을 그대로 그녀에게 포워딩했다. 별다른 코멘트는 없었다.

그녀는 급히 메일을 보낸 시청담당자에게 전화를 한다. 슈테판에게 먼저 전화를 해야할지 잠시 망설였으나 어쨌든 사실관계를 먼저 알아봐야했다.

‘나는 당신이 결혼하지 않았다는걸 믿어요. 하지만, 전산상의 개인정보가 이미 기혼으로 되어있는 한, 당신은 결혼신청을 할 수 없습니다. 일단 관청에 가셔서 미혼으로 처리를 한 후 다시 연락을 주세요.’

담당자는 친절한 말투로 참을성 있게 상대를 안심시켰지만, 반박을 할 틈을 주지는 않았다.




K는 대사관을 통해 자신이 결혼한 상태가 아님을 증명하는 서류를 준비해서 공무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베를린 구석구석 자세히 적힌 지도를 들고, 기차를 세번을 갈아타며 도착한 곳은 처음 보는 지역이었다. 지도가 가르키는 곳에 다다르자, 공사중인 건물 뒤로 다양한 머리의 석조조각들이 장식되어 있는 붉은 건물들이 보였다.

입구의 경비원이 알려준대로 9번 건물을 찾아 들어셨다.(예상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혼란과 권태로 고통받는 얼굴의 부조가 방문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물안으로 들어서자 번호가 적힌 문들이 끝없이 이어진 길다란 복도 중앙 천장에 예약번호를 보여주는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탓에 케이의 번호는 20분쯤 기다린 뒤에 나타났다.

담당 공무원은 느긋한 태도의 젊은 남자였다. K의 신분증과 서류를 확인하고 컴퓨터모니터를 꼼꼼히 보더니 결국 독일정부의 전산상에 그녀가 기혼으로 기록되어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케이가 들고간, 혼인관계증명서에 적힌 ‘혼인기록이 없음’을 보고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2주후에 다시 오세요. 당신이 전에 살던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구청에 연락해 확인하는데에 최소한 2주가 걸립니다.’

‘한달 뒤에 결혼날짜가 예약되어 있어서 그전까지 서류가 모두 준비되어야 합니다. 조금 더 빨리 처리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전에는 불가능합니다.’


집에 오는 길은 이미 날이 어둑해 지고 있었다. 기차 밖으로 펼쳐진 논밭들,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공사가 중단되어 황폐화된 건물들이 있는 낯선 베를린 외곽 풍경은 K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플로리안에게 전화해서 상의해보면 어떨까?’

슈테판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의 대학동창생이고 케이도 전에 한번 본적이 있는 플로리안은 중앙가정법원 판사고, 슈테판은 그래서 그가 이런 경우에 법률적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당신 친구 플로리안? 그 사람은 나에 대해 잘 모르잖아. 내가 외국인이고 당신은 그의 친한 친구라서 내 말을 믿기 보단 혹시 외국을 돌며 결혼사기를 하는 여자인지 의심할수도 있어. 난 그런 편견을 겪고 싶지 않아.’

‘그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 편견이 없는 사람이야, 어느 면에서든. 이런 행정적 오류에 대한 문제에서도 전문가고. 아니면 내가 뭘 할수 있지?’




K는 다음날 베를린에 있는 Spandau 구청에 방문한다.

공무원은 이번에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우리의 전산시스템상에 당신은 2012년 12월, 한국에서 김요한이라는 남자와 결혼한 것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산망의 결혼상태 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뿐, 결혼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서류는 없다고 했다.

‘데이터 관리과정에서 다른 사람 정보와 뒤바뀔 가능성이 있지 않나요? 여기 저의 혼인관계증명서류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다는 2012년에 한국에 있었다는 서류도 있습니다. 말씀하신 정보가 사실이라면, 여기에 결혼 사실이 적혀있겠죠.’

그녀는 K가 내민 서류들를 곰곰히 보더니, 몹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여기에 적혀 있는 ‘결혼 기록없음’은 기록이 되어있지 않다는 것일 뿐이지, 명확히 여기에 ‘미혼’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는 없네요. 이 서류로 당신의 기록을 미혼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 부서의 팀장으로서 할 일이 아주 많아요. 아마 당신은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일을 처리하려면 모든 서류들을 하나씩 찾아봐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어요. 왜 당신은 스스로 하지 않고, 공무원에게 모든 일을 맡기려 하는거죠?’

K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화의 흐름에 당황하여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되묻는다.

‘ 관공서 시스템에 접속할 수 없는 권한이 저에게 없는데, 어떻게 어디서 누가 실수를 한건지를 알아낼수가 있나요?’

담당공무원은 이제 그녀를 더이상 쳐다보지 않고, 빠르게 말한다.

'어쨌든 이 서류로는 내가 전산망의 정보를 바꿀 수 없고,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닙니다. 처음에 잘못 기록한 공무원을 찾아가세요.'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모른다와 기다리라 라는 반복지옥에서 탈출해야 했던 케이는 그곳을 황급히 빠져나온 후 스스로에게 묻는다.

‘결혼을 했다는게 죄를 지은건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에 기록되어있는 이상, 내가 그걸 안했다는걸 입증하려는 순간 나는 죄인이 되고 만다. 그들이 내 서류를 믿지 않는다면 시스템에 접근할수 있는 권한도 없는 내가, 안했다는건 어떻게 증명을 하지..? 그렇다면 나는 그걸 그저 받아들이는건 어떨까?’


생각의 방향을 바꾸자, 문제가 해결된 듯 기분이 상쾌해지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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