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할 때 생각이 맑고 깨끗하면 마음의 참모습을 보게 되고, 한가로울 때 기상이 차분하면 마음의 현묘한 이치를 알게 되며, 담담할 때 정취가 담박하고 평온하면 마음의 참맛을 얻게 된다. 마음을 살피고 도를 깨닫는 데 있어 이 세 가지 보다 나은 것은 없다.
- 채근담 전집 87
무엇인가를 기대하면 문제가 생긴다. 이만큼 해줄 것 같던 사람이 해주지 않을 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을 무시하고 하지 않을 때,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기대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기대와는 다른 행동으로 실망감과 허탈함으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며칠 전 백신 주사를 맞으러 예약한 병원에 들렸다. 집 근처 자주 가던 병원에 예약을 해 놓았기에 여유롭게 준비를 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병원 접수실에서 예약 확인을 하는데 내 이름이 예약자에 없는 것이었다. 여러 번 다시 확인을 해도 없었기에 예약 문자를 확인하니 다른 병원에 예약을 해 놓은 것이었다. 앞 두 글자로 매번 이름이 헷갈렸던 병원이었는데 예약 실수를 해 버린 것이다. 잔여백신 알림은 집 근처 병원으로 잘 등록해 놓았으면서 백신 접종 병원은 왜 이런 실수를 했는지... 핸드폰을 꺼내 예약해 놓은 병원을 검색하니 도보 20분 거리에 있었다. 앱지도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예약시간이 늦을 까 걷다가 뛰다가를 반복해 병원에 도착했다. 예약시간보다 10분 늦게 도착했지만 백신 접종은 가능했다. 주사를 맞고 모니터링 방에서 15분 대기를 하다가 이상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고요한 방의 온도가 긴장했던 마음을 풀어 주었다.
고요함을 뚫고 창 밖에서 요란한 빗소리가 들렸다. 집에 가기 전까지는 그쳐 주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을 모른 체 비는 더 거세게 내렸다. 오후 늦게 출근하는 남편에게 데리러 와 주길 바라는 문자를 보냈다. 남편은 택시를 타고 오거나 비가 어느 정도 그치면 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서운했지만 이해했다. 비가 계속 오면 택시를 타거나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갔다. 콜택시 예약은 대기 중. 비는 계속 내리고.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그냥 걷기로 했다. 주사를 맞은 팔이 욱신 거리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어지러움증도 있었지만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장단에 맞추어 걸었다.
백신 주사를 맞은 날은 무조건 쉬어 주세요 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에 나는 정말 대충 집안 정리를 하고 소파 위에 누웠다. 주사를 맞은 팔은 욱신거려 오른쪽으로만 누울 수 있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낮잠을 잤다. 오랜만에 꿀 같은 휴식이 좋았다. 공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었으니 맘 편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 저녁도 짜장밥으로 대신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저녁밥을 달라고 했다. 오늘은 쉬어야 하니 스스로 해결하라고 말했다. 남편은 나보다 한 달 전에 백신 주사를 맞았다. 아무런 증상 없이 지나갔기에 나의 이런 모습이 유난스러워 보인다고 했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두통과 근육통이 동반했고 조금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진통제를 의지해야 할 만큼 두통이 심했다.
간단하게라도 저녁을 달라는 남편의 말에 몸을 일으켜 라면을 끓여 주었다. 마음이 헛헛했다. 다른 집들은 백신 맞은 날은 서로 품앗이처럼 해준다는데... 나 역시 남편이 백신을 맞은 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게 해 주었다. 그렇게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의 당연함이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당연함의 기대는 실망감으로 남았다.
어둠과 고요함이 가득한 방에 누웠다. 나의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서운한 것은 서운 한 것이고. 남편의 감정은 남편의 것이고. 기분이 딱 상한 이유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기대' 이유는 '기대'였다. 당연히 해줘야 하는 '기대'가 나의 감정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집의 공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나의 마음을 들여보다는 고요한 시간이 요동치던 마음을. 혼란스럽던 마음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해주면 좋은 것이고,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안 해주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마음 쓰지 말자. 인생이 내 맘 갖지 않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자. 사람 마음은 더욱 그렇다.
기대하면 문제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