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흐릿하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새벽이다. 날씨를 예측할 수 없듯이 여행도 예측불가다. 여행에서 만나는 시간들이 그렇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라지거나 숨었거나 문을 닫았거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나.
비는 낭만을 주지 않았다. 안에서 바라보는 비는 낭만일지 몰라도 밖에서 부딪쳐야 하는 비는 눅눅한 신발을 하루종일 신어야 하는 불편함이었다.
후쿠오카 동물원을 가는 날이다. 설레었을 아이의 마음과 달리 밖은 비가 내렸다. 곧 그칠 것 같은 기대감은 걱정과 불안으로 다가왔다. 아이에게는 동물원 하나 보고 떠나온 여행이었다. 함께 하는 여행에는 따로의 여행이 있다. 같이 여행을 하다가도 따로 여행을 즐긴다. 그 첫 번째가 동물원이다. 민이는 동물박사가 꿈인 아이다. 동물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이 무색할 만큼 비는 더 강하게 더 많이 내렸다.
창문에 부딪치는 빗방울이 거세졌다. 이대로 괜찮을까. 한국을 떠나 올 때만 해도 비소식은 없었다. 하루아침에 날씨의 변덕을 마주해야 했다. 동물원이 문을 연다면 비가 와도 동물원으로 가기로 했다. 민에게 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폭우 속으로 우리는 걸어 들어갔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어깨가 젖었다. 우산 없이 걷는 사람들은 온몸이 젖었다. 인상이 구겨진 사람들은 없다. 여행을 떠나온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찾는 듯한 그들의 설렘을 보았다. 여행에서 비를 만나는 건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불안하거나 걱정할 일 또한 아니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불안했다. 속상했다.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 시간을 원망했다. 누구든 좋은 날 여행을 하는데. 왜?라는 물음을 자주 말해야 했다. 왜 나에게만 매번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불평했다. 날씨만큼이나 눅눅해진 마음을 안고 여행을 시작했다. 가야 하는 곳을 가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
비 내는 동물원의 풍경은 새로운 멋을 품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을 만났다. 일본 초등학교 아이들이 줄지어 동물들을 만났다. 아이들의 얼굴이 즐겁다. 설레었다. 우비를 입고 우산을 든 아이들 틈으로 들어갔다. 선생님을 따라 걷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귀엽다. 일본어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기린'이라는 말이 들렸다. 일본에서도 기린을 기린으로 부르는구나 생각했다. 아이들이 걷는 방향에 기린이 서있다. 우리도 기린이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육사가 문을 열고 기린 곁으로 갔다. 기린은 문을 연 사육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의 아쉬운 숨소리가 들렸다. 비가 내리는 기린의 사육장은 비를 피할 곳이 없어 보였다. 우산을 쓴 우리들의 눈빛을 뒤로 한채 안으로 들어갔다.
비 내리는 날 수영을 해본 적이 있다. 어느 눅눅한 여름날 비가 내렸고 친구들과 수영을 했다. 비가 내리는 날 날 수영은 나름의 매력이 있다. 날이 맑은 날 하는 수영과는 또 다른 짜릿함이다. 펭귄의 수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줄지어 걷는 펭귄을 보다가도 물속에 헤엄치는 펭귄을 보다가 길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는 펭귄을 보다가 시간이 흘러갔다. 비는 더 거세졌다. 신발 안은 눅눅해졌고, 빗물은 옷을 적셨다.
날이 좋은 날 동물원은 수없이 많이 만났다. 날이 좋은 날을 찾아 동물원을 찾았다. 폭우가 내리는 날 동물원은 처음이었다. 여행이 아니라면 마주하지 않았을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떠나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여행은 가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한다.
수영을 하고, 입을 벌리는 하마 덕에 민이가 웃었다. 가까이 하마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 모두가 그랬다. 비가 와서 좋았을까. 비가 와서 싫었을까. 하마의 생각이 문득 궁금해졌다. 표정이 없는 하마다. 물을 좋아하는 하마라서 비가 오는 날도 좋아하지 않을까. 민이가 나의 궁금증에 대해 답을 내었다. 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마는 말이 없고, 민이는 추측을 할 뿐이었다. 하마가 물을 좋아한다고 비를 좋아한다는 결론은 오류 투성이니깐. 우리의 시간이 오류 투성이었던 것처럼.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새롭고 색다른 시간을 마주하다가도 틀어져 버린 시간을 원망하다가도, 계획했던 시간보다 더 멋진 시간을 만나기도 했다. 비 내리는 동물원에서 우리는 그랬다.
귀여움을 만났다. 폭우가 쏟아지는 밖의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낮잠을 즐기는 레서판다의 귀여움에 우리는 한참을 이곳에 머물렀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민이 핸드폰 배경사진이기도 하다. 민이가 제일 보고 싶어 했던 동물이었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졌다. 비가 오는 날에는 따뜻한 방 안에서 낮잠을 즐기는 일상도 꽤 멋지다.
비가 와서 좋은 날도 있다. 그냥 비가 오니깐 좋아서 김치전을 부치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신다. 비가 와서 좋으니깐 칼국수를 먹고 비 내리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본다. 비가 오는 날이 싫지만은 않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좋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동물들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말을 전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그 눈빛을 읽을 수 있을까. 민이는 아직은 모르겠다고 말했다. 동물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어른이 되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몸짓이 클수록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도 커질 거라고 민이는 말했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고 믿기로 했다.
이렇게 활동적인 호랑이는 처음이었다. 잠을 자거나 잠깐 어슬렁 걷는 것이 전부였던 호랑이가 우리 앞에서 벽을 타기도 하고 나무에 오르기도 했다가 바닥으로 펄쩍 뛰었다가 우리 앞으로 달려왔다가 멋진 사진 포즈를 취했다. 서비스가 좋아도 너무 좋았던 후쿠오카 동물원의 호랑이었다. 비가 와서 활동적이었을까. 비가 와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옆 사육장의 사자는 비가 와서 자고 있다. 사자는 늘 자고 있다. 날이 좋아도, 날이 흐려도 사자는 늘 자고 있었다. 우리가 만났던 사자는 늘 그랬다.
코뿔소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우리 모두가 처음이었다. 비가 잠깐 그쳐 코뿔소가 밖으로 나왔다. 아니 나오다가 다시 들어갔다. 빗방울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싫어서였을까. 나오다가 들어가는 코뿔소가 아쉬웠다. 더 오래 보고 싶은 마음에 코뿔소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다. 빗방울은 더 거세졌고 코뿔소는 나오지 않았다.
비가내리는 동물원은 처음이었다. 그날 우리가 갔던 후코오카 동물원은 비가 내렸다. 비가와서 좋지는 않았지만 싫지도 않았다. 처음 비오는 날 동물원에 오고, 처음 뛰어 놀던 호랑이를 보고, 처음 하마가 물 속에서 수영하는 것을 보고, 처음 코뿔소를 보았다. 처음 만나는 것 투성인 하루가 좋았다. 비는 오지만 좋았다. 신발이 젖어 양말이 젖고 눅눅한 발냄새가 나도 괜찮았다. 처음 마주한 비오는 날 동물원이 좋았다.
비오는 날 후쿠오카 동물원을 만났으니 다음은 해가 좋은 날 후쿠오카 동물원을 만나고 싶었다. 우리는 그리 생각하며 동물원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