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한 장면이 기억난다.
정년퇴직을 한 남편들이 집에서만 보내며 시시콜콜 살림에 입을 대기 시작한다.
벽걸이 tv뒤쪽 콘센트에 쌓여 있는 먼지들
장식장 구석에 쌓여 있는 먼지들
거실 폴딩도어 유리에 찍혀 있는 아이들 손자국들
몸은 움직이지 않고 입만 움직여 된다.
지금 우리 집에도 드라마 속 남자가 살고 있다.
한 달 가까이 가게문을 닫고 하루 종일 집에서 지내고 있는 남편이 그 드라마 속 남자처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바닥에 머리카락이 보이면 행동보다는 입이 먼저 움직인다.
"거실 바닥에 머리카락 봐라"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머리카락의 실체가 남편 눈에는 어찌나 잘 보이던지 당분간 남편 눈 건강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안 곳곳 구석구석 쌓여 있는 먼지들과 머리카락을 찾아낸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블로그에 서평을 남기면서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나만의 시간이 간절했기에 잠을 줄여가면서 나의 시간을 만들어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에게 사용하고 있다.
아침 8시가 되면 아이들이 눈을 비비면서 나에게 다가온다
그때부터는 나의 시간이기보다는 가족과 나의 공동 시간이 시작된다.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들이 밤새 어질러 놓은 책들과 장난감을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오전 시간은 게눈 감추듯 사라져 버린다.
간단한 점심을 준비하고 치우고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또 내 앞에 다가온 저녁 준비
오늘 저녁은 배달음식으로 대체하고 싶지만 한 달 가까이 손님 한 명 없는 남편의 가게를 보면 한 푼이라도 아껴야 된다는 생각에 냉장고 재료들을 털어 가까스로 저녁을 준비한다.
오늘 하루도 가까스로 잘 버텼다는 안도의 한숨으로 오늘 하루를 정리한다.
나름 집안에서 바쁜 나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잘한다 잘한다' 흥을 불어넣어주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한 달째 손님이 없으면서 다음 달 매장 월세와 직원들 월급 걱정에 머리가 복잡한 남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최대한 서로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냥 그냥 보내는 일상이라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매끼마다 배꼽시계는 멈추지 않고 밥 달라고 소리치고, 뒤돌아서면 난장판이 되어 있는 아이들 방과 거실, 옷을 토해내듯 가득 찬 세탁기, 개학이 연기되면서 집에서 매일 하는 가정학습 동영상 강의를 볼 수 있도록 챙겨줘야 하면서 점점 나의 피로감도 높아지고 있었다.
나의 일상이 집안일에만 집중되어 있다 보니 서평을 작성해야 할 책들이 한두 권씩 밀리기 시작하면서 조급함이 밀려왔다.
오늘 하루만은 집안일보다는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일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에 난장판이 된 거실을 뒤로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tv소리에 집중력은 떨어지고 나의 불쾌지수는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
나의 불쾌지수에 기름을 붓듯 남편의 입근육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안 꼴이 이게 뭐니?
먼지가 가득한 집안이 밖에보다 더 위험하겠네!
각자의 위치가 있고 자기 할 일이 있는데!
책을 읽고 있는 나를 향해 남편의 입근육은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참아야 한다면 내가 참자
둘 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기에 아픈 감정에 더 상처를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폭풍우가 치는 감정들을 간신히 잠재우면서 머릿속에 '감사합니다'라는 다섯 글자를 수없이 외치며 나의 감정들을 달래주고 있었다.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고 힘들었던 그때에 읽게 된 명상에 관련된 서적들 중에 읽게 된 명상법 중 하나인 "감사합니다"명상법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요동치는 나의 감정을 달래줄 때 자주 사용하고 있는 명상 방법 중 하나이다.
같은 시간 속에 서로의 우선순위가 달랐다.
나는 책을 읽고 밀린 서평을 빨리 작성하고 싶었고, 남편은 어질러진 집안이 깨끗이 정리되기를 바랐다.
나는 남편이 나를 배려해 주었으면 했고, 남편은 내가 가정주부로서의 책무를 다하기를 원했다.
남편의 감정은 나의 감정을 이해해줄 틈이 없어 보였다.
한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과 죄책감이 남편의 옳고 그름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가 남편의 마음을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의 틈이 남아 있는 내가 이해하기로 했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어질러진 거실을 정리하고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 실내의 탁한 공기는 밖으로 내보내고 창밖 너머에 있는 봄기운이 충분한 맑은 공기들을 실내로 들어오게 했다.
아파트 화단에 핀 봄꽃 냄새를 가득 품고 있던 그 맑은 공기들은 잠시나마 우리 네 가족의 콧등을 스쳐 지나가며 봄의 기운을 느끼게 해 주고 다시금 사라졌다.
딱 열흘 정도만 마음이 쉴 수 있게 시간을 주는 것이 어떨까요?"
- 내일이 두려운 오늘의 너에게 책 속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