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과의 밥 한 끼
얼마 전, 반가운 사람이 나를 만나러 왔다.시간 되면 밥을 같이 먹자는 문자에 동네의 맛집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밥을 사주고 싶었다. 이탈리아 음식점, 경양식점, 카레전문점, 청국장 음식점. 고심해서 고른 메뉴 사진을 보내며 고르라고 하니 그녀는 이탈리아 음식을 골랐다.식당에 미리 전화로 자리를 예약하고 만날 시간을 기다렸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서로를 끌어안고 반가워했다. 일 년 만의 만남이었고 따뜻한 포옹에서 우리가 얼마가 친밀했던 사이었는지 이 만남이 서로에게 얼마나 기쁜지 알 것 같았다. 테이블이 4개뿐인 작은 식당에서 우리는 함께 밥을 먹었다. 전에 와서 먹었던 루꼴라를 얹은 새우 오일 파스타가 신선하고 맛있었기에 그걸 먹자고 추천했다. 주문한 오일파스타와 라자냐는 무척 맛있었지만. 일 년 동안 쌓인 우리의 이야기가 너무 많아 음식이 식어갔다.
한때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던 사이였다. 친자매보다 더 자매 같은 사이였다. 오히려 친동생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희노애락을 나누었다. 서로의 30대를 그리고 40대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고, 어떤 곤경과 어떤 갈등과 어떤 기쁨이 있었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언젠가 그녀 또한 자신의 형제보다 나를 더 많이 보고 더 의지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녀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며 가족이 되었다. 아직은 어색하고 덜 친했던 어느 날, 우리 집으로 놀러왔던 적이 있다. 아침 밥을 먹고 한 10시쯤이었을까, 그녀는 하루종일 나와 둘이 있다가 저녁까지 먹은 후, 돌아갔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무엇을 하며 그 긴 시간을 함께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중에 깨달았다. 이 사람이 나와 있는 시간이 편하구나. 그래서 내 집에 그렇게 오래 머물렀구나. 어렵고 불편한 시가의 관계들 중에서 나를 가장 가깝게 생각했구나. 의지했구나.
이혼소송을 시작하며 전배우자의 원가족들과도 멀어졌다. 이혼을 하더라도 배우자와 헤어질 뿐, 전 시모, 전 동서, 전 시조카들과는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나의 희망사항이었을뿐. 30년 동안 맺었던 관계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익숙했던 장소들과도 이별하며 참 많이 힘들었다. 한가로운 오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던 집 앞 카페, 내가 항상 앉던 창가의 푹신한 소파. 오후가 되면 길게 들어오던 오렌지빛 햇살, 정갈하고 담백한 반찬이 나오던 동네 밥집. 오래된 연립 주택 단지 안의 벚꽃 나무. 10년 동안 다닌 요가원, 요가원의 재인쌤, 미야쌤. 요가원에서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가지말라며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였던 레이쌤. 봄이 되면 멀리서도 알고 사람들이 찾아왔던 연립 주택의 아름다운 벚꽃은 이제 없다. 재개발이 진행되는 주택보다 먼저 벚나무는 베어졌고, 사진첩을 아래로 한참 스크롤하면 그 꽃들의 사진이 남아있다. 나는 내 식물처럼 아끼던 벚나무의 부재를 중고마켓에 올라온 게시글을 통해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그 곳에서 멀리까지 와 있다.
내 편과 남의 편이 정확하게 정리되었다. 덕분에 관계들 앞에서 머뭇거리던 내 마음도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때 고맙게도 그녀는 한번 형님은 영원히 형님이라며 내 편이 되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이다. 속상해서 우는 내 등을 가만히 쓸어주던 사람이다. 그 손이 얼마나 따듯했는지 모른다. 사람의 손길이 주체하기 힘든 감정도 가라앉힐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순간의 온기를 지금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마음이 더워진다. 30년 시간이 헛되었구나 싶을 때 그래도 한 사람은 남았구나. 그 사실이 주저앉은 내게 힘을 주기도 한다. 한 동네에 살며 자매처럼 의지했던 그 시간의 힘이었을까. 함께 갔던 장소들, 같이 먹은 음식들, 서로에게 했던 작은 선물들. 그런 추억의 힘이었을까.
나는 그녀의 친정엄마를 함께 만나러 간 일도 있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며 찾아갔던 그녀가 어린 시절 살았던 조용한 동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려울 사이였을 사돈 어르신은 나를 반겼다. 금방 끓인 된장찌개를 올린 소박한 밥상 앞에 같이 앉았고, 마당에 있는 대추나무에서 생대추를 따 먹고 고추 밭에 따라가기도 했다. 텃밭에서 뽑아온 배추를 숭덩숭덩 잘라 겉절이를 만드는 사돈 어르신 앞에 앉아 입을 벌려 배춧잎을 씹어먹었다. 설탕을 더 넣자, 고춧가루를 더 넣자 그런 말들을 주고받으며. 그 김치를 나와 그녀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셨다.그러자 나는 손아랫동서의 친정엄마 집이 아니라 동생 손을 잡고 엄마를 보러 같이 간 언니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포근하고 아련한 추억도 있다.
다정한 사람과 마주앉아 먹으니 다 식은 파스타도 라자냐도 맛있기만 하다. 뱃속이 따듯해진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고 서로의 손을 힘주어 잡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마치 친언니에게 일러바치듯 그동안의 힘들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나도 그녀의 힘듦을 알고 그녀도 나의 힘듦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공감하고 이해했다.
나이대가 비슷해 종종 소풍을 다니기도 했던, 이제는 장성하여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와 내일의 꿈도 나누었고, 서로를 응원했다.
힘든 일들이 지나가면 좋은 날들도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설령 또다른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이길 힘과 담대함이 우리에게 있음을 안다. 무례한 사람에게 대응할 수 있는 용기도 우리 안에 자라고 있음을 안다.
좋은 시절이 오면 좋은 날을 잡아 멋진 곳으로 여행을 하기로 약속도 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까지 찍었다. 단단하게 잡은 손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힘을 느낀다. 그 힘이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이끌 것임을 깨닫는다.
헤어지기 전, 나는 직접 만든 실팔찌를 선물했다. 붉은 실에 꽃 구슬을 꿴 팔찌를 그녀의 손목에 매주며 꽃길만 걸으라고 축복했다. 작은 선물이지만 의미는 진심이었고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전철역 개찰구 앞에서 배웅하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팔이 아프도록 한참 흔들었다.
또 보자, 내 동서, 수연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