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 9

by 함지연

이따금 희수의 집에는 주인을 잃은 사물들이 우는 소리를 낸다. 서랍을 열면 거기 희수 엄마가 모아놓은 단추, 꽃무늬 손수건과 둘둘만 노끈이나 끈적이는 고무줄, 오래된 공과금 영수증 뭉치, 액정이 깨진 휴대전화가 뒤엉켜 있다. 국수를 삶던 찌그러진 솥 위에 코팅이 벗겨지고 그을린 프라이팬이, 그 위에 크고 작은 몇 개의 도마가 그 위에 쟁반이 아슬아슬 얹혔다. 조심성 없이 걷다가 건드리면 사물들이 제각각의 소리를 내며 와장창 무너진다.

무료한 어떤 날은 서랍 하나를 방바닥에 쏟고 그 안의 사물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만져 본다. 그리고 남김없이 도로 담는다. 괜히 그러고 싶어 져서 슬쩍 내 면도기나 양말 한 짝을 거기 보태기도 한다.


싱크대 하부 장에는 내가 희수의 엄마에게 선물한 신발이 상자째 그대로 있다. 시장에서 제일 작은 운동화를 사 안쪽에 휴지를 뭉쳐 넣고 끈을 단단히 조여 신는 걸 보며 내가 일하는 매장에서 구두를 사 드렸다. 마침 작은 사이즈의 구두가 새로 들어왔는데, 소가죽인데도 무겁지 않고 가벼웠다.

신제품은 10퍼센트밖에 할인이 안 되기에 기다렸다가 브랜드 세일 기간에 40퍼센트 할인을 받아 살 수 있었다. 백화점 카드가 있으면 추가할인도 가능했는데 내겐 없었다. 매니저의 카드를 빌려 5퍼센트 추가할인까지 받아 164,730원에 구매하고 165,000원을 현금으로 돌려줬다.

희수의 엄마는 큰돈 썼다고 이런 비슷한 신발 시장에 가면 만 원이면 산다며 당장 환불하라고 성을 냈다. 신어나 보라고 했는데 구두는 맞춤처럼 딱 맞았다.


헐떡이지도 않고 어쩜 이렇게 잘 맞니? 백화점에서 파는 건 역시 다르구나. 이 구두 신고 달리기도 할 수 있겠다.

이거 신고 좋은 곳 많이 가요.


좋은 신을 선물하면 그 신이 선물 받은 이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말이 있다. 어디서 유래한 미신인지는 모르지만, 매장에서 구두를 팔며 고객에게 숱하게 그 말을 지껄였다.

그래, 생각만 해도 신난다. 나도 놀고 너도 놀고 희수도 노는 날 어디라도 가자. 비싼 신발 사줬으니 밥은 내가 쏠게.

그 약속 꼭 지키세요.

그럼 당연하지. 내가 니들 맛있는 거 사줄 돈은 충분하다. 양수리로 토종닭 먹으러 갈까? 아니면 인천 가서 해삼이랑 멍게 먹을까? 우리 제일 비싸고 제일 좋은 거로 먹자.

저는 다 좋아요. 그런데 지금은 국수 먹고 싶어요. 배고파요.


새 신을 신고 거울 앞에 서기도 했다가 벗어서 꼼꼼히 안쪽까지 보며 살살 쓰다듬기도 하던 희수의 엄마는 가격표도 떼지 않은 구두를 부직포에 도로 넣은 후 박스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배가 터질 만큼 국수를 삶아 나를 먹였다.

신지 않고 넣어둔 구두는 외피와 내피, 밑창까지 서서히 삭는데 결국 신을 수 없게 된다. 5와 1/2 사이즈, 발등을 덮는 부분에 골드색 체인 장식이 있는 4cm 굽의 소가죽 로퍼. 발에 잘 맞는지 보려고 작은 방에서 더 작은 방으로 부엌에서 현관 앞까지 사뿐사뿐 걷고 소풍 가는 날 꺼내 신을 거라며 다시 넣어 보관했던 구두가 조금씩 삭고 있는 집. 나도 쉬고 희수도 쉬고 희수의 엄마가 건물 청소를 하러 가지 않는 어떤 날, 유원지로 놀러 가자고 했던 약속도 구두처럼 삭고 있는 집.

희수는 희수의 엄마를 닮았다. 자신의 엄마를 닮아 아주 작은 발을 가졌다. 5와 1/2. 아주 작고 무지 외반증이 있다. 작은 키에 콤플렉스가 있어 줄곧 아찔하게 높은 하이힐만 신은 탓에 양쪽 발 안쪽에 모두 뼈가 도드라지게 튀어나와 있다. 희수는 희수의 엄마와 발이 닮았다. 발은 희수가 가장 간지럼을 타는 부위이기도 해서(성감대이기도 하다) 깨물거나 간지럽히면 나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실컷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희수의 엄마를 닮았다. 희수는 오른손잡이고 희수의 엄마와 나는 양손잡이다. 나는 주로 오른손을 쓰지만, 가위와 칼만은 왼손을 썼다. 내가 가위질하는 모습을 본 희수의 엄마는 참 신기하다, 나도 가위질은 왼손으로 한다, 그런데 너도 그러네? 그러며 빙그레 웃었다. 그때 나는 희수 엄마가 중부시장에서 잔뜩 사 온 다시마를 자르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는 작디작은 발을 가졌지만, 손은 커서 뭐든 일 년 치 먹을 만큼 사서 쟁인다. 자르며 맛본 다시마는 아주 짰고 씹을수록 쫀득거렸다. 그 다시마를 한 조각 씹고 싶다.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양념치킨 한 마리와 콜라 큰 것을 주문해야겠다. 몇 조각은 남겨 내일 아침으로 해결하기로 한다. 뭔가를 만들어 먹으려면 재료를 사야 하는데, 어떻게든 재료는 꼭 남게 된다. 버려지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사 먹는 것이 경제적이라고(물론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이 파묻혀 있어서 진입이 불가한 상태이기도 하다), 쿠폰 두 장을 더 모으면 공짜 치킨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라앉았던 기분이 나아진다. 한참 만에 전화를 받은 치킨 가게에서는 배달이 밀려 두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TV시청도 인터넷 검색도 하지 않으니 오늘 밤, 축구 경기가 있는 줄 몰랐다.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니 갑자기 공복 상태를 참기 어렵다.

지금껏 염치를 알고 살았으니 이제부터라도 염치없이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낡고 무너지고 바스러지고 차츰차츰 삭는 저 사물들의 일부분처럼 사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 그랬듯이 내일 아침에 지쳐 돌아올 희수의 시간은 조금도 방해하지 않을 예정이다. 매일매일 루틴처럼 그녀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한 후에야 살금살금 방에서 빠져나왔고 기어 들어갔다. 그녀가 없을 때만 빈 집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한참 참은 오줌을 소리 나게 눴다. 욕실 청소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희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변기를 닦았다. 거품이 그대로 남은 샤워볼도 잘 헹궈 창문에 매달아 말렸다.


오래전, 고양이가 되고 싶다던 조카가 내게 삼촌은 장래 희망이 뭐야 하고 묻는데 대답할 수가 없더라. 왜냐면 장래 희망 같은 건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거든. 고양이가 장래 희망인 나의 조카야, 나는 구두 주걱이나 문지방 혹은 주전자 뚜껑 따위가 되고 싶다.

희수도 그런 나의 마음을 아나. 어쩐지 요즘 부쩍 나를 사물 취급하더라. 전에는 한 번씩 들여다보고 누워있는 내 옆구리에 사정없이 발길질이라도 했는데 그러면 눈물이 찔끔 나게 아프면서도 싫지만은 않아서 야, 진짜 되게 아프다 하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는데(역시 나는 센 여자에게 끌린다), 지금은 내가 누워 있는 방 근처엔 아예 얼씬도 않는다.

희수에게 애인이 있다면, 그와 더불어 살고 싶다면 당연히 희수는 희수의 방에서 그와 더불어 사는 것이다. 여긴 희수의 엄마가 희수에게 남긴 희수의 집이니 그것은 마땅한 일이다. 나는 그냥 머리는 책상 아래, 발은 서랍장에 닿은 채 바로 누웠다가 몸이 저리면 다시 머리는 그대로 책상 아래, 발가락은 문지방에 걸치도록 돌아누우면 되는 것이다. 물론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으나 어쩌다 실수로 소리가 날 경우도 있겠지. 이를테면 책상 아래 쌓인 먼지가 콧구멍을 간질일 때. 이를테면 흔들리는 책상 위에 놓인 망치 같은 것이 굴러 복부를 가격할 때. 그래서 희수의 애인이 이게 무슨 소리냐 묻는다면 그녀는 무심히 이렇게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

저건 그냥 사물이 내는 소리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