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속 암살 이야기
‘브루투스 너마저’

대중적 동의를 얻지 못한 혁명은 반역으로 기억될 뿐이다.

by 최성진

연극 속 암살 이야기 ‘브루투스 너마저’

‘브루투스 너마저’, 셰익스피어 희곡 ‘줄리어스 시저’ 중 시저 암살 과정에서의 가장 인상적인 대사다. 그러나 실재 그런 일은 없었으며 단지 극적효과를 위해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대사다. 이 대사만큼이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시저의 명언이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

전쟁에서의 승리, 로마 내란의 종식 등 로마의 영웅으로 등장한 시저.

찬사 받던 영웅 시저가 그 영화(榮華)를 팽개치고 권력의 탐욕에 심취되어 독재자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BC 44년 3월 15일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공모로 암살당하기 전까지 말이다.

원로원들의 시저 암살 요청에 브루투스는 갈등하게 된다. 그 갈등은 셰익스피어의 ‘줄리우스 시저’에서도 확인되는데, 그 비극적 고뇌는 생사를 문제 삼아 고뇌하는 햄릿의 원형이 된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브루투스의 경우 죽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고민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조상 루키우스 브루투스의 공화정 창건을 이유삼아 시저의 암살을 결심하게 된다.

여기서 잠깐, 브루투스의 조상 루키우스 브루투스는 과거 왕정을 반대하고 공화정을 창건한 인물이다. 그가 왕정을 반대한 데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로마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에 의해 아버지와 형제들이 처형당한 사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왕의 막내아들인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사촌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겁탈한 사건 때문이다. 결국 기원전 509년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면서 로마의 공화정이 시작되었다.(이때 공화제의 공고함을 위해 대의멸친으로 자신의 두 아들까지 처형한 브루투스의 일화가 있다. 훗날 다비드의 그림으로 그 의지가 재생된다)

브루투스의 어머니는 참주암살자로 명성이 높았던 세르빌리우스 아할라의 후손이다. 그는 기원전 439년 스푸리우스 마일리우스가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공화정을 종식시키고자 할 때 단도를 품고 공회당으로 들어가 그를 찔러 죽인 인물이다.

이처럼 브루투스의 조상 중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독재에 저항하고 공화정이라는 정치적 제도를 실현하기 위해 애쓴 인물들이 존재한다.

원로원 문턱을 의기양양 넘어서던 시저. 시저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왕좌로 향하던 순간 원로들이 시저의 옷단을 끌어당기고 그의 목과 옆구리에 단칼을 쑤셔 넣는다. 원로들의 서슬 퍼런 칼날이 과신했던 시저의 빈틈을 결정적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 수많은 원로 중에는 과거 그에게 출세의 빚을 진자들이 수두룩했지만,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다. 시저의 눈에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권력자의 몰락을 방관하는 희미한 브루투스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시저의 죽음 이후 모든 이들은 도망치기에 급급했는데 브루투스는 자신의 정당성을 연설하기 위해 연단으로 올라간다.


왜 브루터스가 시저에게 역모를 했는가?

이게 내 답이요.

내가 시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오.

여러분은 시저가 죽어 자유인으로 살기보다

시저가 살아 그의 노예로 죽길 원합니까?

시저가 날 사랑했기에, 난 그를 위해 눈물 흘립니다.

그가 행운을 타고났기에 난 그것을 기뻐했고,

그가 용감했기에 나는 그를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가 야심을 품었기에 난 그를 죽였습니다.

그의 사랑에 대한 눈물,

그의 행운에 대한 기쁨,

그의 용기에 대한 존경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야심에 대해서는 죽음이 있습니다.

- 셰익스피어의 ‘줄리우스 시저’, 3막 중에서 브루투스의 연설-


시저의 죽음 이후 그의 심복이던 안토니우스의 처형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안토니우스를 죽이는 일은 정의에 어긋난 일로 보고 언젠가 자신들의 편이 될 것이라 믿고 그를 살려둔다. 안토니우스는 암살자들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고 시저의 유서를 빙자하여 시민들에게 각각 75드라크마씩의 돈을 나눠 줄 것과 티베르강 건너편에 있는 자신의 정원을 시민들에게 개방하게 된다. 시민들은 시저에 대한 동정과 감사의 마음이 고조되고, 안토니우스는 관례에 따라 시저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의 공적을 알리던 중 피범벅이 된 시저의 옷을 집어 들고 로마시민에게 암살자들을 처형할 것을 부르짖는다.


친구여, 로마인이여, 동포 여러분, 귀를 빌려 주십시오.

난 시저를 장사 지내러 온 것이지 칭찬하러 온 건 아니오.

인간의 악행은 죽은 후에도 남지만

인간의 선행은 뼈와 함께 땅에 묻히게 마련이오.

시저 역시 그럴 것이오.

고결한 브루터스는 시저가 야심에 불탔다고 말하였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확실히 슬픈 결점이며

가슴 아프게도 시저는 그 값을 치렀소.

난 브루터스와 그 밖의 분들의 허락을 받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브루터스는 고매한 분. 그 밖의 분들도 고매하지요.

난 시저에게 추도사를 하러 이곳에 온 것이오.

시저는 내 친구이며, 내게 성실하고, 공정하셨소.

그러나 브루터스는 그를 야심가라는 거요.

브루터스는 고매한 분이시오.

시저는 많은 포로들을 로마로 데려왔으며

포로들의 몸값은 모두 국고에 들여놓았소.

어찌 이것이 시저의 야심이란 말이오?

가난한 사람들이 배고파 울부짖을 땐 시저도 함께 울었소.

야심이란 이보다 더 냉혹한 마음에서 생기는 법.

그런데도 브루터스는 그를 야심가라 하오.

어쨌든 브루터스는 고매한 분이오.

여러분은 보셨을 거요.

루퍼커스 제전 때 내가 세 번씩이나 시저에게

왕관을 바쳤지만 세 번 다 거절한 것을.

이게 야심이오?

그런데도 브루터스는 시저가 야심을 품었다고 말했소.

분명 브루터스는 고매한 분이시죠.

내가 브루터스의 말씀에 대항하는 건 아니오.

다만 아는 바를 말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오.

여러분은 한때 시저를 분명 사랑했소.

물론 이유가 있어서요.

그런데도 왜 여러분은 그를 애도하기를 꺼리는 겁니까?

오, 분별력이여!

그대는 금수에게 도망쳐버리고

사람들의 이성이 눈이 멀었는가.

날 용서하시오.

내 심장은 시저와 함께 관 속에 들어갔소이다.

심장이 내게로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오.

-셰익스피어의 ‘줄리우스 시저’, 3막 중에서 안토니우스의 연설-


교활한 안토니우스의 술책에 결국 브루투스와 그 동지들은 로마를 떠나게 된다.(플루타르코스는 브루투스의 치명적 실수를 안토니우스를 살려둔 것과 장례절차를 일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시저의 죽음 후 로마는 안토니우스의 세상이 되었다. 적어도 시저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돌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그가 로마로 돌아오면서 모든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시저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시민들에게 나눠주며 인기를 얻게 되고 과거 시저를 따르던 병사들이 하나둘 흡수되면서 안토니우스와 대항할 만한 세력을 키우며 원로원과 자신의 적 안토니우스를 포섭하게 된다. 결국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반역자로 제거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비싼 천으로 염을 한 뒤 화장하여 그 재를 어머니인 세르빌리아에게 보낸다.

과거 정의를 실현하던 두 인물의 말로가 그렇게 마감되었다. 초라한 그들의 죽음보다 더 씁쓸한 것은 브루투스와 함께 과거 필리피 전투 참전했던 메살라의 말이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편에서 안토니우스와 싸웠는데, 이때 옥타비아누스의 질문에 "보신 바와 같이, 난 언제나 가장 정의의 편에서 싸우는 사람입니다."라는 씁쓸한 말을 남기게 된다.

브루투스의 연설은 논리적인 반면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감성에 호소한다. 브루투스가 대의명분을 통해 자신의 암살 당위성을 이성에 호소하고 있지만 안토니우스는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고 시저의 죽음을 자신과 로마시민, 조국의 죽음으로 묶어 호소한다.

역사 속에서 브루투스가 행한 시저 암살은 정의롭게 평가되는가?

마지막 칼을 거꾸로 꼽아 놓고 그 위에 쓰러져 자살하는 브루투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숭고보다는 비루한 브루투스의 죽음으로 기억한다.

모두가 정의란 말로 반역과 역모, 항명을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의 숭고함을 기억하기보다 권력의 힘을 기억하고, 대중적 감수성을 더 기억한다는 점이다. 대의명분이 중요한 게 아니다. 대의명분을 설득할 감수성이 더 중요한 것이다.

결국 대중적 동의를 얻지 못한 혁명은 반역으로 기억될 뿐이다.


201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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