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공길 : 너는 죽어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프냐?
양반으로 나면 좋으련?
장생 : 아니.. 싫다
공길 : 그럼.. 왕으로 나면 좋으련?
장생 : 그것도 싫다.. 난 광대로 다시 태어날란다
공길 : 이놈아..광대짓에 목숨을 팔고도.. 또 광대냐..
장생 : 그러는 네년은 뭐가 되고프냐?
공길 : 나야.. 두말할 것 없이... 광대!!!... 광대지!!!
장생 : 그래.. 징한 놈의 이 세상..
한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
광대로 다시 만나.. 제대로 한번 맞춰보자..!
영화 <왕의 남자> 중에서 공길과 장생의 대사 일부
여름에 태어나 여름에 떠난, 숨 막힐 정도로 뜨겁게 살다 간 어느 광대의 삶을 조명하려 한다.
오늘 소개하려는 인물은 공옥진 선생(1931~2012, 향년 80세)이다.
예전에 '혜화동 1번지'에서 전통을 탐구하는 과정의 하나로 <이야기의 방식, 춤의 방식 –공옥진의 병신춤 편>이 윤한솔 연출에 의해 공연된 적 있다. 공옥진 선생과 관련된 그 공연 정보를 보고 이 글을 쓰게 된 건 아니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치졸할 정도의 핑계가 될 수 있겠지만, 사실 그렇다.
현재 연재하고 있는 연극 이야기에서 광대에 천착해서 쓰고 있던 중, 밥 호프와 어윈 코리를 정리하면서 우리 시대 한국의 광대는 누굴까 고민했다.
사실 난 이전부터 맘 속 한편에 공옥진 선생을 꼭 끌어안고 숨겨두었었다.
그건 혹 나의 글이 그녀의 거대한 삶을 초라하게 장식할까 두려워서다.
병신춤의 대가로 알려진 공옥진 선생.
선생의 존함은 늘 병신춤이라는 단어가 동의어로 인식되어 왔다.
1인 창무극의 명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의 삶에는 가난과 슬픔의 삶을 등에 꼽추처럼 짊어지고 살아온 억척이 묻어 있다.
7살 어린 나이에 맞닥뜨린 어머니의 죽음, 이어 한국전을 겪으며 목격한 수많은 죽음과 공포.
스승 임방울과 첫아들, 남동생 삼채와 재순, 곱사 조카의 죽음 등 불가항력적인 이별을 경험하며 삶의 덧없음을 뼛속 깊이 느꼈을 것이다. 켜켜이 쌓인 원망은 풀지 못한 채 삭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녀의 삶은 14살에 당대 최고의 춤꾼 최승희의 몸종으로 일본에 팔려가 모진 식모살이를, 그리고 귀국 후 부친의 행방을 몰라 기댈 곳 없는 그녀는 각설이패와 걸인생활을 해야 하는 필연을 낳았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또다시 그녀는 걸인생활을 하게 된다.
전쟁 중 거리에서 보았던 고아, 광인, 장애인 등의 삶을 몸으로 부대꼈을 것이다.
소녀 공옥진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혈혈단신,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소녀의 몸으로 말이다.
그 당시 걸인들과 함께했던 동지애적 삶은 체화된 기억이 되어 훗날 그녀가 소외된 이들과 소통을 이어가는 연(緣) 실이 된다.
많은 이들은 그녀의 춤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애환을 녹여내는 이 시대 최고의 스토리텔러였다.
이미 태생부터가 대를 이어온 예술가 집안이었다.(영화 ‘왕의 남자’의 공길이 실제 실록에 기록된 인물이었으며 그가 유배를 당해 내려왔다. 공옥진 선생은 그의 후손일 것이라는 추정이 있으며, 2NE1 소속이었던 가수 공민지는 공옥진 선생의 손녀다)
그녀의 조부 공창식(孔昌植,1887~1936)은 송만갑 국창의 제자였으며, 아버지 공대일(孔大 一, 1911~1990)은 그 아버지와 장판개 명창에게 소리를 배웠다.(공창식이 공대일의 팔촌형이라는 논문이 있긴 한데 공식적인 언론의 글을 따라 조부로 기재함)
그녀는 조선창극단(1945년 입단), 고창명창대회 장원(1948년), 임방울 창극단 협률사 입단(1957년), 김연수 우리국악단, 김원술 안성국악단(1960년까지) 등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다.
그녀의 아버지, 김연수, 임방울로부터 판소리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등을 배웠다. 또한 그녀는 잡기(雜技)*에 능한 광대였다.
*잡기, 혹은 잡색이라고도 한다. 춤과 노래, 재담과 기예를 포함한다. 여기서는 모방에 중심을 두어 어떤 사물이나 사람 혹은 동물의 생김새를 풍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를 대표하는 병신춤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1968년 동경에서 열린 재일교포 광복기념 경축행사 초청 공연이었는데, 이때 자신은 단순히 흉내가 아닌 진정한 예술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맘을 품게 된다.(병신춤의 시작은 임방울 창극단에서 선보였는데 1970년대 이후 보이는 춤과는 다른 춤사위였다 한다)
이후 그녀는 장애인들과 걸인들의 움직임과 심리상태를 관찰하고 광주에서 ‘병신춤’ 발표를 하게 되는데 이때 장애인들의 항의와 비난으로 공연을 접게 된다(이 일로 그녀는 불갑사에 출가를 하기도 한다)
1977년, 정병호 선생이 민속춤 현장조사차 영광에 들러 공옥진 선생의 병신춤을 보고 서울의 ‘공간사랑’ 소극장에 소개한다. 이를 계기로 1978년 4월 공옥진 선생의 병신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때 선생은 판소리와 재담, 그리고 병신춤 57가지를 성황리에 선보인다.
당시 극장 사무장이었던 강준혁의 권유로 일인 창무극 <심청가>가 탄생되며 이후 1인창무극의 대가가 된다.
세상에 유명해지면서 그녀의 병신춤 또한 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끊이지 않는 병신춤에 대한 대중의 오해와 장애인들의 비난으로 결국 새롭게 창작된 것이 ‘동물춤’이다.
그가 병신춤을 춘 데에는 단순히 모방정도로 사람들의 웃음을 사기 위함이 아니다. 창에도 능하고 연기에도 출중해 다수의 창극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으며 스스로 창극단을 만들어 순회공연도 해왔던 이가 뭐가 아쉬워 장애인 흉내를 냈을까?
그녀의 동생은 ‘벙어리’였고, 그 동생이 낳은 딸도 등이 안팎으로 굽은 ‘꼽추’였다. 세상의 업신여김을 받고 살아온 동생과 조카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그녀는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육체적 혹은 인격적 해방을 시도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소외된 자들이 계급에 대한 조롱이나 비판을 담는 저급한 익살극이 아니다. 체화된 장애, 다시 말해 병신-되기를 통해 한(恨)을 품으려 한 것이다.
그것은 장애를 체화시키는 근본적 동화를 통해 사회 구성원이 지닌 본질적 장애를 풀어내는 씻김이며 풀이다.
그것은 카타르마 희생제의처럼 내부의 근원적 악을 끄집어내는 집도의식이며 나아가 공동체 전체가 의식의 해방을 맞이하는 카타르시스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방은 미학으로 논할 때 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에 중심을 둔다. 그것은 단순히 외형적 모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여지는 것 혹은 인지된 것의 모방, 다시 말해 인식론적 재현이 아니다(그것은 훗날 로마시대에 이르러 미메시스를 라틴어 ‘imitatio’로 오역하면서부터다)
그녀는 한(恨)의 정서를 원망의 정서가 아닌 씻김과 풀이의 정서로 보았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속(俗)과 추(醜)를 선택한다. 그것은 성스러운 것과 아름다운 것의 대척점에 놓인 것들이다. 충분히 아름답고 고귀한 공연을 고집할 수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속된 것과 추한 것은 우리 삶, 곳곳에 내재되어 있다. 그런 것은 우리의 얼굴, 우리의 외형 우리의 주변에 늘 항존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가장 이상적 미와 성스러움을 쫓는다.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은 우리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이데아다.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추함이나 속됨은 우리의 주변 혹은 외모나 맘속에 존재한다. 다만 그것들을 거부함으로 소외시킴으로 우리가 조금은 더 성스럽고 아름답다고 여길 뿐이다.
공옥진 선생은 우리가 버리고자 하는 추함과 속됨을 온몸으로 품어 자신을 산화시킴으로 그것들을 소멸시키는 제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 내부에 있는 본질적인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글을 마무리하며
일인 창무극의 창시자며 천의 얼굴을 통해 해학과 풍자로 대중과 소통하려 했던, 좀 더 과감히 말해 장애인과 걸인, 소외된 자들의 벗이 되려 했던 공옥진 선생. 그는 소녀의 순수함을 잊지 않고 오로지 예인으로써 한평생 살아온 명인이다.
그는 이 시대가 낳은 진정한 대(大) 광대다.
2018.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