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수용소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살게 할 귀리죽은 무엇일지 고민해 보며

by 함니

"내 삶에 무슨 마가 꼈길래 이리도 고통스러울까."


어느 날 문득

내 삶이 온통 사방이 막힌 철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일상은 온데간데없고 숨이 막히는 고통만이 나를 에워싼 느낌.


흔히들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어, 너만 힘든 게 아냐!"라고 말하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그런 말은 아끼려 한다.

타인의 비극을 내 위로의 땔감으로 쓰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낸 사람들을 보면 묘한 힘을 얻는다.

동시에 내가 겪는 이 고통이 과연 그만큼의 무게일까 자문하며 스스로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내 인생의 가장 짙은 암흑기에 다시 꺼내 든 책이다.

사실 구김살 없이 평온하던 시절 이미 한 번 읽었던 책이지만,

그때는 별다른 감흥 없이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픈 시기에 다시 만난 이 책은 조금 원망스러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나의 아픔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거대한 절망 속에서도 인간은 결국 의미를 찾아냈는데,

지금 내가 겪는 아픔 또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자유와 일상을 모두 빼앗긴 극한의 수용소에서도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반대로, 모든 자유와 일상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나의 삶을 수용소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 질문 끝에 깨달았다.

삶에 주어진 평범한 일상을 내가 원하는 만큼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권리,

즉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바꾸는 자유'가 이미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그 깨달음은 나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하지만 성찰의 유효기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았던 탓일까.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진 요즘,

나는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독서 모임에 가지고 나왔다


책 속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귀리죽 두 그릇이 본인한테 건네지는 순간, 심장이 멈춰버릴 정도였다.
두 그릇을 나에게 준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일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의 하루를 견디게 하는 힘이 고작 '귀리죽 두 그릇'이라는 사실에 한참을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삶을 돌아본다.


지금 내 삶에서 '귀리죽'은 무엇일까.

어제와 다름없이 주어진 따뜻한 커피 한 잔,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

혹은 내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의 시선.


수용소 밖의 풍요 속에 살면서도 정작 그 귀리죽의 기쁨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엇이 내 삶을 수용소로 만들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 나를 살게 할 나의 귀리죽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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