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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Apr 21. 2018

믿음으로 산다는 것

창 12:10-13:17

   삶의 행로가 평탄하여 탄탄대로를 걷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 지시하시는 대로 걸음을 옮겼고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약속의 말씀을 확증해 주신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경배를 드렸다는 뜻이다. 호사다마였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시험이었을까? 아브라함의 신앙의 연단을 위한 수단이었을까? 가나안에서의 아브라함의 삶은 그렇게 형통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 머무는 땅 가나안의 삶에 위기가 찾아왔다. 기근이 든 것이다. 그 기근으로 붙박이도 아닌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연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험난한 삶의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고 고향을 떠나왔고 그 땅에 당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만나주시고 약속을 확증까지 해주셨는데, 이제 기근이라니... 참 난감했을 것 같다. 부르짖는 기도라도 했을 법 하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요 필요 불가결한 식량을 제대로 공급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행동을 했을까? 참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고 푸념을 늘어놨을까? 하나님을 향해 항변을 했을까? 불평 섞인 말로 온갖 수단을 강구하려 동분서주했을 것 같은데... 성경은 별로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 그냥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고 거기서 아내를 애굽 왕의 눈에 뜨이게 하여, 어찌 보면 아내를 팔아 치부를 한 것처럼 보이는 대목에서는 이게 과연 믿음의 사람의 행보인가 싶을 정도로 의아심이 들게 된다.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을 보면서 믿음을 붙들고 세상에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새겨본다.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은 분명하다. 그런데 삶의 상황은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여기서 인간 아브라함의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에 대해서, 우리의 선입견은 아브라함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어찌 됐건 우리는 아브라함이 신앙의 위대한 영웅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도 인간적인 아브라함의 행위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기막힌 상황에 직면했다. 셈족 여인으로 하얀 피부의 미모의 아리따운 여인 사라는 함족의 땅 애굽의 까만 피부의 사람들 눈에는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고 누구의 눈에도 쉽게 뜨여 여차하면 죽임을 당하고 아내를 빼앗기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아브라함의 처지를 생각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온 것보다도 지금의 이 상황이 더 힘들고 어려웠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에는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 명령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인간 아브라함으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곤란함 그 자체였다. 기근으로 도저히 연명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애굽까지 내려갔다. 아내를 뺏기든 자기 목숨을 뺏기든 어떤 것도 자기가 선택할 여지가 없는 지경에 처한 것이다. 그런 전후 상황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아브라함은 아내를 팔아 치부를 한 아주 파렴치한 인간으로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아내야 하는 세상은 그저 희희낙락 평탄대로를 걸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토록 큰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아무런 징조도 없다. 그 모든 문제 앞에서 혼자 고민하고 문제를 풀어가야만 한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간 행동 자체가 비난받을 만한 일이었을까?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에 머무는 것인데 아브라함이 섣불리 선택을 해서 애굽에 내려가는 바람에 그런 위기를 만난 것일까?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그냥 우리의 생각으로 헤아려 보는 것일 뿐이다.     

   앞질러 결과를 살펴보면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바로에게 많은 소유를 얻어가지고 떠나오게 된다. 기근을 피한 것 정도가 아니라 어디에 가서 살아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많은 것들을 가지고 나오게 된다. 이런 것을 두고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라고 연결하여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지면 세상에서 이렇게 복을 누린다는 공식으로 말하게 되면 성경을 바로 본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을 생산하는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고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간섭이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을 생각하며 묵상하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택과 결단 그리고 행위에 있어서 어찌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삶에 간섭하고 계시는 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행위의 완벽함을 추구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일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무엇을 하고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함을 깊이 생각해 본다. 

   세상의 역사는 저절로 그냥 진행되고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간섭하여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세상 속에 진행되는 모든 일이 그냥 우연히 일어나는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통찰이 소위 역사관이라는 것이다. 사람마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있게 마련이다. 세속사건 구속사건 간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현저하게 달라진다.    

   아브라함 당시의 애굽은 어떤 나라였을까? 고대국가들에서 농경이 주는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애굽은 나일강 삼각주가 가져다주는 풍요로운 곳이었다. 극심한 기근을 피하여 애굽에 내려간 아브라함을 대하는 애굽인의 지위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배고파서 피신해온 사내의 손아래 있는 여인의 지위는 말 그대로 바람 앞의 등불이다. 생사여탈권이 본시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아브라함의 처지는 자기 아내를 지키고 말고에 대해서 아무런 권한이 없는 사면초가였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 처한 사람이 당시에 아브라함 한 사람뿐이었겠는가? 숱한 사람들이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어려움 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한 사람 아브라함의 어려움에 대해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상황이 구체적으로 기록된다. 당시 강대국 애굽의 왕 파라오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피난해 온 한 사람의 아내를 취하려 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고, 누가 보아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연한 수순을 밟는 가운데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진행된다. 구체적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이 임하였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한 연고로 생겨난 일임을 분명히 알 만큼 생생하게 진행되었다.    

   저절로 진행되는 세상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 아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역사를 시작하시고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모든 역사는 조절된다. 아브라함의 삶의 행로에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이 어떠함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선택된 아브라함의 삶이다. 아브라함의 모든 삶의 행로는 단순한 한 사람 개인의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일부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삶의 환경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를 진행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다. 애굽 왕 바로가 행하는 일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훼방하는 사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조치를 취하신다. 아브라함의 가정을 보존하시고 그의 후사를 통하여 구속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이 구체적인 이유이다. 바로 왕은 감히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압도되어 아브라함에게 가능한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 땅에서 서둘러 내보낸다. 바로의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일반적인 생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역사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다가 호된 어려움을 겪은 끝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애굽을 나올 때는 부요한 자가 되어 나오게 되었다. 이방 땅에 나그네로 살아가야 하는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약속의 땅이나 애굽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이 어려운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고 그의 삶에 간섭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의 행로에 하나님의 분명한 간섭하심이 드러난다. 애굽에서 떠나올 때 그는 가축과 은과 금을 풍부하게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생존하기에 넉넉할 만큼의 부요함이었으리라. 이것을 세상의 축복이라고 말한다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잘해서 받은 상급도 아니고 요행수로 얻은 횡재도 아니다. 아브라함의 부요의 원인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부요케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척박한 그 땅에서의 아브라함의 삶을 보존하시는 섭리이다.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진행을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의 구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한 사람을 선택하셨고 그를 통하여 일이 진행된다. 그 모든 과정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진행되는 섭리적 과정이다.    

   애굽에서 돌아온 아브라함은 벧엘에서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아브라함의 장막에 함께 거주했던 조카 롯도 부요함을 함께 누리는 자가 되었다. 그들이 함께 거주하기엔 땅이 비좁을 정도가 되었다.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서게 된다. 이 부분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과 롯의 신앙의 차이점이다. 어떤 것을 더 소중히 여기고 우선의 가치로 보느냐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서면서 나눈 선택의 과정에 롯의 모습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소돔은 비옥한 지역이었고 문명이 번성하는 도시였다. 그런데 성경은 소돔 사람이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다고 한다. 세상의 부요와 번영이 하나님을 의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떠난 악을 행함에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땅이 좋게 보여 선택하고 떠나간 롯의 모습에서 세상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죄악으로 이룬 번영의 모습은 일면 좋게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악한 죄인들의 번영일 뿐이다. 우리는 보이는 세상을 따라갈 것인지,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을 따를 것인지, 늘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하나님의 구속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집중되고 있다. 롯이 갈라선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언약을 반복하신다. 아브라함의 시선을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시고 그에게 약속을 새롭게 하신다.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땅의 티끌처럼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을 줄 것이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약속으로 주신다. 땅의 부요가 목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신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모습이다. 우리의 삶에서 언제나 우선 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로 마음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이 땅의 번영과 부요를 위해 하나님을 떠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예배 가운데서 얻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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