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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May 03. 2017

장길산

황석영 장편소설

   장길산이 홍길동, 임꺽정과 더불어 3대 의병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황석영(본명 황수영)의 장편 대하소설 [장길산]을 서민들의 삶이 날로 팍팍해져 가는 요즘 읽어서 그런지 더 많이 가슴에 와 닿는다. 자연재해로 인한 굶주림에 더해지는 폭정은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이렇게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이 맞닿아 맷돌 갈 듯이 들들 갈아 뒤집어엎어버리고 새 세상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늘어놓기 일쑤이다. 요즘 시국이 뒤숭숭해져서 그런지 의병이니 활빈당인지 하는 단어들이 주는 느낌은 더 유별나다.


  책을 읽는 내내 활빈도들이 거사를 일으켜 성공하고 새로운 세상을 이루는 모습을 그려보았는데 책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시원한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 책을 쓴 저자의 시대상황이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은 북녘에 고향을 둔 저자의 망향가로도 비쳐지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소설 [장길산]은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시대의 양상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게 한다. 판소리 사설들과 흥겨운 가락들이 흘러나와 절로 어깨가 들썩거리는 춤사위의 신명이 묻어 나오기도 한다.


   책을 손에 잡기 시작하면서 놓기까지 10권의 분량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흥미진진하다. 재미가 있다. 의식도 뚜렷하다. 시대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 그 시대에 비추어 오늘을 조명해 볼 수도 있다. 세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서평을 옮겨본다.  

  

황석영 장편소설 '장길산' (시사저널 서평)

민중 해방을 향한‘꿈의 서사’로 읽자

손경목 (문학 평론가)  

   

   황석영 소설 <장길산>의 주인공은 ‘도둑놈들’이다. 이 소설은 17세기 말 조선조를 무대로 하여 실존 인물이었다는 ‘의적’ 장길산과 그를 따르는 무리의 활약을 그려냈다. 이미 읽은 독자에게는 새삼스런 요약이 될 테지만, <장길산>의 기둥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천한 광대 출신인 장길산이 부정한 현실에 눈뜨는 성장사, 그가 그 현실을 바로잡으려고 동료들을 모아 관리와 부자 들을 징치하고 활빈하는 과정, 세력을 키운 장길산 무리가 다른 집단들과 준비한 모반이 실패한 뒤 관군의 토벌을 이겨내고 홀연 사라지는 결말이 그것이다.    


   도둑, 그것도 명분을 갖춘 의적 이야기들은 대개 흥미롭다. 사회 질서를 위협할 뿐 아니라 기존 가치를 갈아치울 대의마저 간직한 도적들 이야기는 적대 세력들 사이의 대등한 맞섬이 가져오는 긴장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이 긴장은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고 유지하기에 충분하다. 홍명희의 <임꺽정>이 작가 당대의 독자뿐 아니라 오늘의 독자·시청자에게도 큰 호소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찾아질 만하다.    


   그런데 <임꺽정>에 견주어 <장길산>의 의적들은 훨씬 더 자각적이고 목적의식이 뚜렷한 풍모를 띠고 있다. 이를테면 그들은 왕정 자체가 무너져야 한다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장길산은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우리가 힘을 합쳐 싸워야 할 백성의 나라’(9권 53쪽)임을 다짐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이런 근대적 정치의식이 17세기를 산 도적들의 것일 수 있는지 의문을 품어봄 직은 하다. 하지만 그 의문은 역사학자나 비평가에게 일단 맡겨두자.  

  

   한 편의 소설을 읽기에 초대받은 독자가 눈여겨볼 것은 중심인물들의 이러한 생각과 행동이 <장길산>에 강렬한 비극의 무게와 비장미를 얹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활빈도나 미륵도, 살주계(殺主契) 같은 저항의 움직임에 종횡으로 연루된 숱한 인물들의 험하고 기박한 삶의 행로는 비극적 수난과 희생의 의미망을 거느리기에 모자라지 않는다. 소설의 짜임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길산과 묘옥의 엇갈리는 사랑도 닫힌 사회 속 억눌린 삶의 쓰라림을 인상 깊게 전한다.    


   비극이 <장길산>의 전부를 말해 주지는 않는다. 수없이 등장하는 밑바닥 인물들(대단한 성깔과 완력을 가졌거나 그윽한 인품의 소유자이고, 갈데없이 미욱하거나 꾀주머니가 달린)은 <장길산>을 생명력과 활기, 풍자와 해학이 넘쳐나는 민중적 잔치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기도 하다. 거침없는 상말, 결말의 잔치 볼거리    


   그들이 구사하는 다채로운 수사, 거침없는 상말과 풍요한 결말의 잔치를 충분히 맛보지 못한다면 <장길산>을 읽는 보람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비극과 잔치의 동시 병존은 이 소설이 억압과 수탈을 몸소 감당하면서도 그것에 부딪쳐 역사를 밀고 나온 기층 민중의 삶에 대한 긍정과 애정의 응결체로 읽혀야 할 까닭을 마련해 준다.    


   독자가 또 유념해서 볼 만한 것은 <장길산>의 세계와 작가 당대의 긴밀한 연관이다. 이 소설은 정치적 억압과 저항이 치열하게 맞서던 지난 70~80년대의 정황을 곳곳에서 떠올린다. 여기에 대해서는 작가가 당대를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 일정한 역사 왜곡이 빚어졌다는 지적이 나와 있다(강영주 같은 연구자). 이 소설의 도적들이 너무 이상화한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불만도 있었다. 그것들은 그것들대로 따져볼 문제이지만, 사실 또는 사실주의적 기율에의 충성이 리얼리즘의 성취를 판가름하는 요소는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장길산>의 장점을 잘 살려내는 독법은 아마 이 소설을 ‘해방’을 향한 소진되지 않는 꿈의 서사로 읽는 것이다. 이 소설은 장길산이 잡혀 죽지 않고 사람들 속으로 파묻힌다는 처리에 이어, 구렁에 처박힌 채 미륵 세상의 도래를 기다리는 운주사 와불 설화를 되새기는 것으로 끝내고 있다.     


   그것은 현실의 질곡에 대한 해방의 꿈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코 점멸되거나 사라질 수 없음을 감동적으로 일러준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독자에게 있는 한 황석영의 <장길산>은 거듭 읽힐 만한 소설의 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 탁월한 작가의 거주지가 감옥이라는 사실은 오늘 한국 문학의 불행이자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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