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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Jun 06. 2017

책은 도끼다

박웅현 인문학 강독회

2012년 1판 29쇄. (주)북하우스 퍼블리셔스


  저자가 책을 어떻게 읽고 소화해내는지 자기 나름의 방식을 말했던 여덟 차례의 강연을 정리한 책입니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방식과 정리하는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저자가 접근하는 책 읽기 방식은 상당한 울림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대로 따라가며 각 장별로 요점을 정리해 봅니다.    


1강 시작은 울림이다

2강 김훈의 힘, 들여다보기

3강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통찰

4강 고은의 낭만에 취하다

5강 햇살의 철학, 지중해의 문학

6강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7강 불안과 외로움에서 당신을 지켜주리니, 안나 카레니나

8강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바라보다    


1강 시작은 울림이다.    


  저는 여느 독서가들과 비교했을 때 독서량이 평균에 미치지 못할 겁니다. 매번 읽은 책들을 메모해놓는데, 통계를 내보면 일 년에 읽은 책이 서른 권에서 마흔 권 사이입니다. 한 달에 세 권 정도 읽는 건데 독서량이 많은 건 절대 아니죠. 대신 저는 책을 깊이 읽는 편입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눌러 읽습니다. 

  우선 저는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좋은 부분들, 감동받은 부분들에 줄을 치고, 한 권의 책 읽기가 끝나면 따로 옮겨놓는 작업을 합니다. 이 강의의 목표는 이런 방식의 책 읽기를 통해 제가 느낀 ‘울림’을 여러분께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에게 울림을 주었던 책들을 말씀드릴 겁니다. 제가 김훈을 왜 좋아하는지, 알랭 드 보통에 왜 빠지는지, 고은의 시가 왜 황홀한지, 실존주의 성향이 짙은 지중해풍의 김화영,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왜 전율하는지요. 그리고 아무도 이길 수 없는 ‘시간’이라는 시련을 견뎌낸 고전들의 훌륭함에 대해 이야기할 겁니다.    


판화가 이철수의 다른 시선    


  어느 날 동료의 책상 위에 있는 이철수의 [산벚나무 꽃피었는데]의 책장을 무심히 넘겼는데 순간 몇몇 페이지에서 눈, 아니 마음이 멎었습니다. 기막히게 청각을 시각화해내는 표현들, 내가 그동안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세심한 시선들이 단박에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후 [마른풀의 노래], [이렇게 좋은 날]까지 구입해 읽었는데, 한 페이지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 아주 좋은 책이었어요.


  이철수는 저에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동양의 삶의 태도와 서양의 삶의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비교하게 해주었는데, 그것은 판화 <가을 사과>에 쓴 한 줄의 글이었습니다.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사과가 떨어진 걸 만유인력 때문이라고 기어이 과학적으로 밝혀내고야 마는 것은 서양의 장점입니다. 그리고 동양의 장점은 때가 되어서 떨어지는 걸 왜 안달복달 난리들이야 하며 자연을 아우르는 철학입니다. 과학적으로 끌고 온 서양의 담론과 노력은 인정하지만, 동양의 것은 이렇게 쾌도난마快刀亂麻의 느낌이에요.     


  이철수의 판화집 [마른풀의 노래]를 읽고 다음으로 펼쳤으면 하는 책이 있다면 최인훈의 [광장]입니다. 이철수가 그림과 텍스트를 함께 두고 단 한 줄로 충격을 주었다면, 최인훈은 산문 곳곳에 운문처럼 배치한 문장들로 저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저는 [광장]을 읽고 시처럼 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산문은 운문에 비해 술술 읽히기 마련인데, 최인훈의 [광장]은 산문임에도 곳곳에서 문장이 각인되는 소설이었습니다. 소설 속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늙은 군인이 훈장 자랑하듯    


  전성기를 가졌던 사람들의 모습을 이 한 구절에 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늙은 군인이 훈장 자랑하는 모습을 생각해보세요. 막걸리잔을 앞에 놓고, 무용담을 들려주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이 평범한 서술문에서 폭넓은 삶의 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오덕이 엮은 창의성의 보고    


  이오덕 선생이 아이들의 시를 모아놓은 책 [나도 쓸모 있을걸]에서 아이들은 창의적인 일이나, 새로운 발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스승입니다.    


엄마, 엄마,

내가 파리를 잡을라 항께

파리가 자꾸 빌고 있어.    


ㅡ 경화 봉화 삼동국교 1년 이현우, [파리]    


  감탄사가 바로 나오지요? 이건 어른들의 시선에서는 절대 안 나옵니다. 생각해보세요. 파리가 두 발로 싹싹 빌고 있는데 어떻게 잡겠어요. 순진무구하고 신선한 시선만이 발견할 수 있는 모습예요. 내가 무심히 지나친 것을 그렇게 새롭게 봐줬다는 것이 감탄스러운 문장입니다.   

 

삶의 풍요를 위한 훈련    


  이렇게 울림이 있는 것들과 함께하면 좋은 점은 무엇보다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겁니다. 저는 지금 인문학과 관련된 강의를 하고 있지만, 그동안 사람들이 저를 통해 듣고 싶어 했던 것은 ‘창의력’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가르치는 학과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마침 강의력이 광고의 수단이 되니까 광고를 만드는 박웅현이 발상하는 과정을 보여줘 봐라 해서 얘기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고민이 많이 됐지요. 창의력이라는 게 가르치기 참 어려운 것이더군요. 그런데도 그동안 사람들은 이걸 기어이 가르치려고 했구나, 그래서 ‘좋은 카피를 쓰는 20가지 방법’과 같은 것들이 나왔구나 싶었죠. 그런데 24년간 광고 현장에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이번에는 카피를 의문문으로 써봐야지, 이번에는 ‘나’를 주어로 써볼래, 그렇게 마음먹고 써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카피란 그렇게 써지는 게 아니거든요. 창의성이라는 건 상품화하거나 규정화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디어는 총체적으로 나오지 도식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도식적이지 않으면 어려우니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굳이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창의성과 아이디어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일상’입니다. 일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대처 능력이 커지는 것이죠.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감동을 받는다는 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2강 김훈의 힘, 들여다보기    


[자전거 여행]을 중심으로 감동을 나누려고 합니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 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런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않은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첫 문장 “슬픔도 시간 속에 풍화되는 것이어서”라는 건 슬픔이라는 것도 풍화돼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 절절하던 사랑도 잊혀가고 없어진다는 거죠. 이렇게 슬픔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삼십 년이 지났더니 아버지와 사별했다는 슬픔, 아버지가 이제 안 계신다는 슬픔은 없어졌어요. 세월이 지나고 나니 더 이상 그 사실이 슬프지 않아요. 하지만 삼십 년 세월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프다는 감정이 풍화돼 없어졌다는 그 사실이 슬퍼요. 이건 또 다른 슬픔인 겁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의 슬픔조차 없어졌다는, 이 슬픔은 먼 슬픔인 거죠. 그리고 내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진 슬픔은 가까이 있는 슬픔이고요. 그래서 먼 슬픔이 들어와서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하죠. 풍화돼버린 오랜 슬픔 때문에 삼십 년 전에는 울었는데 지금은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오래된 사람들은 울지 ㅇ낳고 무덤가를 방문하고요, 새로 죽은 사람들을 찾는 이들은 울면서 무덤가를 방문해요. 어떤 인간들은 울면서 오고, 어떤 인간들은 울지 않으면서 무덤가에 오죠. 당신들이 울든 울지 않든, 인간사, 문명사가 어떻게 되건 자연사는 같거든요.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나요. 이 얘기입니다.    


  책 [자전거 여행]의 앞부분의 [꽃 피는 해안선]이라는 글에 봄 여행을 하며 마주친 꽃들에 대해 묘사한 글이 나옵니다. 저 같은 사람은 꽃을 보고 그냥 ‘아, 예쁘다’하고 지나가는데, 김훈은 탐사 정신을 발휘해 물어보고 따져보고 알아보고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기 선수답게 발견해내고 표현합니다. 먼저 동백꽃을 생각해보세요. 동백꽃에 대한 구절입니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안개꽃이나 많은 꽃들이 군집으로서 아름다움을 과시합니다. 그런데 동백꽃은 전부 다 개별자들로 존재하죠. 이 생각을 저는 못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걸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래서 봤더니 진짜 진달래나 개나리 같은 꽃들은 개별자가 아니었습니다. 늘 단체로 있죠. 하지만 김훈의 말처럼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 있으면서도 군집으로의 현란함을 이루지 않아요.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이런 것이 바로 김훈의 관찰의 힘인 것 같습니다. 시이불견 청이불문, 우리가 다 시청했던 것입니다. 다만 김훈은 견문을 한 것이고요.    


사실적인 글쓰기의 힘    


  요즘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많은 기자들이 의견을 사실인 것처럼 전달합니다. 가령 이런 거죠. “민족 최대의 명절 설, 헤어지기 싫은 어머님의 마음을 가득 안은 기차는 다시 서울로 향합니다.” 이 문장은 100퍼센트 사실만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사실 그대로 전하자면 설 명절이 끝나서 사람들을 태운 기차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헤어지기 싫은 어머님의 마음을 가득 안은’이라는 주관적인 감상을 덧붙이고 마치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감정을 객관적으로 표현한 문장으로 [화장]의 한 구절입니다.    


‘소각완료’라는 글자는 추호의 모호성이 없었다.    


  화장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슴이 무너지는데, 소각완료, 갑자기 죽음이 드러나버린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모호성이 없는 거죠. 감정적으로 봤을 때는 해석되지 않는 단어지만 기계적인 단어로 끝났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죠. 현장에서 사람들은 그 단어를 보고 섭섭해하겠지만 기계적으로 보면 어쩌겠어요. 끝난 것을. 인생이 기계적이고 냉정하게 종료되는 것입니다. 김훈은 말합니다.   

 

나는 사실만을 가지런하게 챙기는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그 가지런한 사실을 통해 감동을 전하는 김훈의 문장이 저는 참 마음에 듭니다.    


3강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통찰    


  알랭 드 보통은 이제 갓 사십 대 초반이 된 작가이지만 우리들에게 소설, 에세이, 평론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통해 익숙한 이름입니다. 그중에서 그의 소설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우리는 사랑일까], 그리고 문학평론서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에 대해 다룰까 합니다. 저는 알랭 드 보통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로 처음 만났는데요, 일고 난 후 이 책을 그가 스물일곱 살에 집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이 친구가 미쳤구나’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았길래 이십대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미치지 않고서 이게 가능한 일일까 싶었어요. 이 책이 강렬한 느낌을 주었던 것은 바로 ‘통찰’ 때문이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할 때 우리가 하는 생각, 감정, 행동 같은 것들을 낱낱이 분해해서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떤 부분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지, 사랑을 할 때 어떤 행동을 왜 하는지, 왜 지쳐가는지 등에 대해 아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는데, 대단한 통찰입니다.    


행복은 선택이다    


  알랭 드 보통의 책 [불안]은 사랑을 해부하듯 현대인들의 불안을 해부해줍니다. 그가 해부해놓은 것들을 쭉 읽고 나면 내가 하는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불안]이라는 책을 읽으면 덜 불안해져요. 사랑을 해부한 것을 보고 나면 내 감정에 당황하지 않고 지혜롭게 대처하듯이 불안도 그렇게 대처할 수 있게 만들어주죠. 


  요즘 시대에는 필요 이상의 것을 먹으면서 아주 풍요롭게 살고 있어요. 인류의 어떤 시기와 비교하더라도 가장 풍요롭죠. 그런데 우리가 과연 풍요롭게 살고 있느냐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봐요. 그 이유는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풍요는 상대적이라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사는데 저쪽은 저렇게 사네 하는,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에요.     


4강 고은의 낭만에 취하다    


  유흥준은 고은을 가리켜 “사실주의, 민족주의, 낭만주의가 한 몸으로 육화되어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가 되고 마는 신묘한 경지의 시인”이라고 평했습니다. 고은은 “동해는 예술이고 서해는 인생이다”와 같은 표현을 무심하게 툭툭 던져내는, 말이 곧 시詩인 사람입니다. 호수에 사본 적 있으세요? 호수는 찾아가 보면 아름답긴 한데 한편으로는 멍해지면서 마음이 비워지지 않나요?    


뭐니 뭐니 해도

호수는

누구와 헤어진 뒤

거기 있더라    


  연인과 같이 가면 “와, 좋다, 예쁘다” 할 거예요. 그리고 금방 상대를 보느라 호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겠죠. 하지만 헤어지고 혼자 가서 보면 호수가 보일 거고 또 얼마나 휑하겠어요. 평소엔 잘 안 보이다가 헤어지고 가면 감정이입이 되면서 텅 빈 호수가 훨씬 더 잘 보이는 거죠. 그러니까 그 어느 때보다 호수가 강력하게 인상에 남는 순간은 누군가와 헤어졌을 때라는 얘기입니다. 


  고은을 읽고 나면 김훈과 유홍준, 미셸 투르니에가 떠오릅니다. 좋은 책들은 다 서로 돌고 돌아 감성을 전달하고 무뎌진 안테나의 주파수를 잡아주는 것 같습니다.    


5강 햇살의 철학, 지중해의 문학    


화단에서는 군데군데 꽃이 눈을 떠, 깜짝 놀란 소리로 ‘빨강!’ 하고 외쳤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대표작이자 일기체로 쓴 유일한 장편소설 [말테의 수기]의 한 구절입니다. 지금 같은 봄이면 늘 떠오르는 구절이지요. 개나리가 “노랑!” 진달래가 “분홍!” 벚꽃이 “하양!”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계절입니다. 지중해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프랑스인으로 알제리의 알제가 고향인 알베르 카뮈와 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김화영, 그리스인 니코스 카잔차키스까지 단어마다 문장마다 지중해의 찬란한 햇살을 부숴넣은 작가와 작품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앙코르와트 같은 동남아시아의 문화유적에 복잡한 패턴이 연결되는 것은 그 지역이 정글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뒤엉킨 식물로 꽉 들어찬 땅에서는 확 트인 풍경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중남미 마야인이나 동남아 크메르인들의 조각품이 띤 복잡한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의 조각품은 곧 우거진 삼림과 정글을 반영한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에서는 확 트인 공간이 낱낱의 물체와 대비되며, 따라서 집단보다는 개체가 더 강조된다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 사상, 더 나아가서는 서양 문명의 성격을 나타내는 그런 특징도 어느 정도는 풍경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 사람들 머릿속에 얽히고설킨 정글의 나무와 풀 등이 새겨져 있다면, 반면 화사한 색감의 그림들이 자동으로 떠올려지는 남프랑스는 햇살이 예술을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김화영은 알베르 카뮈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행복의 충격]이라는 책에서 지중해성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왔다고 말합니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 고흐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입니다. 부질없는 사후의 성공을 제외한다면, 살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대표적인 인물이죠. 그는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되지 못하고, 자기 그림을 팔아 1백 프랑을 벌어보겠다는 꿈도 평생 이루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는데요. 그런 그가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 아를로 가서 그린 <아를의 고흐의 방>이나 <해바라기> 같은 그림들은 모두 행복의 충격을 그려낸 것들이 아닐까 하고 김화영은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고흐와 똑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책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행복의 충격]은 참 아름다운 문장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알제는 해가 비칠 때면 사랑에 떨고 밤이면 사랑에 혼절한다.    


  김화영이 표현한 지중해의 한 도시입니다. 이 문장 속에는 슬픔도 없고 이별도 없어요.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행복한 상태인 것이죠. 이별과 슬픔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이런 문장이 혹한의 시베리아에서 나올 수 있을까요? 지중해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예요. 해가 비칠 때면 사랑에 떨고 밤이면 사랑에 혼절하는 곳, 지중해인 것이죠.     


해가 설핏해질 무렵 돌연 우리의 뼛속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저 기이한 슬픔......    


  지중해에 산다고 칩시다. 햇살 가득한 하루가 축복이었어요. 그런데 해가 지면 불현듯 슬픔이 찾아옵니다. 죽음에 대한 예고처럼요. 해가 지는 것처럼 언젠가 죽음이 온다는 기이한 슬픔이 밀려들어요. 지중해에 살지 않는 우리들도 감미로운 기쁨과 정반대의 순간들을 만나지요. 특히 일요일 오후 언뜻 해가 질 무렵의 먹먹함과 허무함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합니다. 감미로운 기쁨이 있는 것처럼 뜻 모를 슬픔이 문득 찾아오는 것. 이렇게 삶이라는 건 열린 창문 사이로 밀려드는 햇살처럼 순간의 기쁨, 그리고 그 나머지의 슬픔으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유한한 생명이 부여된 인간의 숙명일 수도 있겠네요.    


  저는 바로 이런 기후와 환경이 실존주의 철학의 모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문학을 통해 아마도 여기서 그 뿌리가 나오지 않았나 짐작해보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지중해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지중해성 철학이라고 정의하고 제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 바로 지중해성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부터 큰 영향을 받진 않았지만, 또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고 살았지만, 저의 사고 패턴들을 보면 다분히 지중해성 기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 나오는 주옥같은 문장입니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창의력이 무엇인지를 이 문장에서 보여주는데요. 앞의 문장에서 ‘현자’ 자리에 ‘창의력이 있는 사람’을 넣어보세요.     


그대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창의력이 있는 사람이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꼭 들어맞습니다. 창의력이라는 건 무심히 보지 않고 경탄하면서 보는 것이죠. 집중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겁니다. 앙드레 지드는 시인의 재능이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우리는 자두를 보고, 수박을 보고, 사과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의 지성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자입니다. 이 책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경험담을 소설 형태로 엮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인공인 “나”는 그리스 뱃사람인 조르바를 만나 광산 개발을 하러 가려고 하죠. 투자하는 데 실패를 합니다만, 내용을 읽어보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주인공인 ‘나’보다 조르바에게 더 집중하고 애착을 갖습니다. 이유는 조르바의 삶의 모습이 지식인과 정반대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책을 통해 그는 조르바를 “아직 자연과의 탯줄을 끊지 않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지중해성 창의력을 말할 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방인]의 주인공은 뫼르소라는 남자입니다. 이 사람은 이해하기 쉽게 조르바 같은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또한 눈앞에 있는 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죠. 그래서 뫼르소를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거짓이라는 건 단순히 진실의 반대편에 있다는 의미뿐 아니라 과장돼 나타나는 감정의 표현까지도 포함하죠. 가슴이 찢어진다는 표현, 거짓입니다. 아무리 슬퍼도 가슴이 찢어지지는 않아요. 그건 과장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가슴이 찢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을 필요로 해요. 하지만 뫼르소는 그것, 과장된 무엇을 거부합니다.


  예를 들어 소설 속에서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은 날 여자랑 섹스를 합니다. 슬픔은 잡히지 않는 것인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더 큰 슬픔을 느끼게 되고, 거짓 감정에 휩싸인다는 것이죠. 햇살 찬란한 지중해에 위치한 알제에 살고 있는 뫼르소는, 현재가 전부이고 감정이나 신을 믿지 않습니다. 감정, 신, 슬픔, 도덕, 종교, 가식, 미래, 신념 같은 추상적인 것들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이방인이라 부르고 이방인이 된 뫼르소는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 안에서도 그는 담배, 해수욕, 여자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을 그리워합니다.    


  보통 우리가 쓰는 글들은 앞의 구절을 받아서 이어가는데 [이방인]의 문장들은 그런 게 없어요. 과거로부터 현재를 빌려오지 않고 미래를 담보하지 않아요. 실존적인 삶의 태도와 맞물리죠. 그런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을 똑같이 차용한 것이 이 책의 대단한 점이라고 사르트르가 극찬을 합니다.    


각개의 문장은 그 전의 문장들로부터 이미 얻은 힘을 이용하기를 거부하며 저마다의 문장은 항상 새로운 시작이다.    


  실존적인 삶, 오늘이 전부이고 개가 그러하듯 밥을 먹을 때 밥 먹고 꼬리칠 때 꼬리치는 것과 같은 뫼르소의 삶을 묘사하는 문장 하나하나는 독립적입니다.     


개개의 문장과 다음 문장 사이에서 세계는 무로 돌아갔다가 소생한다.    


  그래서 현재와 다른 과거와 미래에 의지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자는 철학을 쓰면서, 과거와 미래의 문장에 의지하지 않고 현재의 문장들만 썼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르트르는 [이방인]을 읽고 형식과 내용이 같이 가고 있다는 얘기를 한 겁니다.     


  장 그르니에는 알베르 카뮈의 스승입니다. 스승 그르니에의 소설인 [섬]의 앞부분에 카뮈가 서문을 썼는데 이런 문장이 있어요.    


(...)이 겉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 문장에는 중요한 단어 세 개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워요. 정말 축복이에요.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 허물어지게 되어 있고 그게 슬픔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절망적으로 ‘카르페디엠’을 해야 해요.  지중해의 햇살이 이 문장으로 다 이해가 되는 거죠. 순간의 나는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다. 신은 내 속에 있다는 이야기가 뭔지 알 수 있어요.


  혼자서 지중해로 훌쩍 떠나보시길 바랍니다. 김화영과 알베르 카뮈, 니코스 카잔차키스, 장 그르니에를 통해 햇빛이 온몸을 채우는 낯선 도시로 떠나 겸허하게 삶을 돌아보는 소중한 경험을 해보시길.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6강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네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 철학, 역사, 정치 등 소설에서 다룰 수 있는 현실의 모든 이야기를 다 담고 있습니다. 책은 전부 7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 장은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책은 사랑에 관한 철학적 담론을 충실히 담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어떤 사랑 이야기보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 나가던 의사 토마스가 테레사라는 여자를 만나 시골 정비사로 살아가게 되는, 연민으로 시작한 숭고한 사랑 이야기, 토마스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연민의 대상이었던 테레사의 위치로 자기 자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며 상대를 끌어올린 것이 아니라, 테레사를 위해 자신이 아래로 내려갔어요. 이야기 끝에 이르면 테레사는 그런 토마스에게 미안해하고 그를 안아주죠. 결국 그 포옹이 마지막 춤이 되고, 두 사람은 함께 눈을 감습니다. 사랑을 믿지 않는 또 다른 여자 주인공인 사비나도 부러워했던 사랑입니다. 이 책은 철저한 사랑 이야기 속에 철학, 사상, 시대적 통찰이 공존합니다. 사랑의 공간 안에 삶의 모든 이야기가 맞물려 있는 겁니다. 슬픔이 형식이고 행복이 내용이었다는 테레사와 토마스의 사랑에 대한 마지막 구절은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넘어선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7강 불안과 외로움에서 당신을 지켜주리니, 안나 카레니나    


  [안나 카레니나]는 전인미답의 인생을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이 읽으면 특히 좋은 책입니다. 그들이 겪어나갈 사고의 혼돈, 인생의 질곡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민과 행동이라는 걸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 책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를 어느 정도 갖춘 사람들에게도 [안나 카레니나]는 훌륭합니다. 


  모든 인생은 전인미답이에요. 비슷할지언정 어떤 인생도 전인미답이 아닌 게 없어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어떤 상황에 처음 닥쳤을 때 내 감정 상태를 모르거든요. 이게 사랑인가? 질투인가? 정의인가? 잘 몰라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길을 잃지는 않을 거예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한 여자를 중심으로 뻗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골목골목 세밀하게 표시된 지도처럼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를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중심은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입니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집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곳은 기차역이었고요. 그런데 안나는 결혼한 여자입니다. 게다가 남편 알렉세이는 대단히 잘 나가는 군인이죠. 그는 성공한 사람에게서 발결할 수 있는 ‘설정의 세계’에 사는 사람입니다. 아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아이는 어떻게 자라야 하고, 가정은 어때야 하는지 자신이 설정한 모습을 현실에 그대로 재현하려는 사람이에요. 관료적이고 외교적인,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차가운 사람입니다. 안나는 그런 알렉세이가 고른 아주 완벽한 여자였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은데 집안도 훌륭한 여자였죠. 안나도 청년 장교 브론스키 백작을 만나기 전에는 알렉세이의 설정에 맞춰 살았습니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죠. 그러나 때때로 밀려드는 허무함에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곤 했어요. 그럴 때 브론스키를 만난 거죠.


  브론스키는 잘생긴 청년 장교입니다. 그의 인생철학은 ‘인생은 다른 곳에 있다’로 집약될 수 있죠. 한 곳에 머무르며 한 남자, 여자와 결혼을 하고 행복한 척하는 위선적인 삶보다는 마음이 가는 대로 자유롭고 솔직한 삶을 더 추구해요. 그리고 톨스토이의 표현에 의하면 브론스키는 위선적이지 않은 생활자들의 무리와 어울립니다. 가식이 없고, 정열에 솔질하고, 감정에 충실하고, 탐미주의적인, 물론 겉보기에는 아주 멋진 사람들이에요. 또 사교계를 주름잡던 어머니와 거의 기억에 없는 아버지 덕에 가정생활의 맛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죠. 그런 사람이 안나와 마주하게 되는 겁니다. 그는 기차역에서 처음 안나를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안나는 그때 바람피운 오빠 오블론스키와 그 때문에 마음이 돌아선 그의 아내 사이를 중재하려고 오빠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요. 기차 안에서 브론스키의 엄나와 같은 칸에 타고 도착해 자연스럽게 브론스키를 만나죠. 안나는 브론스키를 처음 봤을 때 멋진 젊은 장교이고 괜찮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브론스키가 느끼기에 유혹적인 말투로 이야기를 나누죠. 그리고 기차에서 내렸는데 역무원이 기차 사고로 죽어요. 식구가 많은 가장인데 순간 세상을 뜨게 된 거라 안나가 미망인을 안타까워합니다. 바로 그때 브론스키가 역무원의 가족에게 주라면서 200루블을 선뜻 내줘요. 왜 줬을까요? 안나에게 잘 보이려고 준 거예요. 다른 거 없어요. 사람 심리는 생각보다 단순해요. 그리고 안나도 그걸 알아요. 브론스키가 고백한 것도 아닌데 직감으로 느껴요. 만약 안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브로스키도 그 돈을 내주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안나가 안타까워하니까 얼른 돈을 준 겁니다. 안나에게 보여주려고 말이죠. 그리고 안나는 브론스키를 만나죠. 그게 시작이에요.


  그리고 브론스키를 좋아하는 키티라는 여자가 있어요. 키티는 오블론스키의 처제예요. 안나와는 사돈지간이 되네요. 키티는 브론스키도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어느 순간 브론스키가 구혼할 것이라고 믿어요. 브론스키도 물론 키티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평생 같이 살아야겠다는 정도는 아니죠. 그 자체가 워낙 가정생활에 대한 감이 없고 그걸 지키기 위해 위선적으로 살아갈 마음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안나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키티는 버림받죠.


  여기서 또 한 인물, 레빈이 등장하는데요, 레빈은 키티를 좋아해요. 사실 레빈은 오블론스키의 아내이자 키티의 첫째 언니인 다리야와 둘째 언니 나탈리를 좋아했지만 그녀들이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한 후 아이 때분터 봐온 키티를 좋아하게 돼요. 나중에는 결국 키티와 연결이 되지만, 처음 키티에 대한 연정을 품고 구혼을 하려고 했을 때 키티는 레빈이 아닌 브론스키에게 마음이 있었어요.


  [안나 카레니나]는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닙니다. 농노제 붕괴에서 러시아혁명에 이르는 한 시대를 아우르는, 토마스 만의 표현을 따르면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소설이죠. 이 사회 전반에 걸친 농노해방운동의 사회 변혁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레빈의 형 니콜라이가 있어요. 니콜라이는 공산주의라는,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큰 이상향의 이념이 나온 그때 농노해방운동을 펼치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겠다는 이론가이자 지식인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론을 위한 이론가일 뿐이죠. 그러니까 니콜라이의 인문은 ‘기계적 인문’이에요. 기계적 인문은 제가 만든 말인데, 땅에 발을 디딘 현실적인 인문학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이론만 가지고 사회를 파악하려고 하는 인문을 말합니다. 기계적인 인문을 하는 사람들은 현실과 부딪혀 문제를 풀지 않아요. 책으로만 배운 인문은 민중의 해방을 위해 민중을 교육시켜야 해요. 그런데 민중이 일을 해야 하니 일을 하게 둬요. 그리고 밤늦게 일이 다 끝난 후 학습을 시켜요. 그 학습은 민중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시간 투자이기 때문에 절대 빠져서도 안 돼요. 그러니까 잠을 못 자게 하고, 술 한 잔도 정신이 흐트러져 안 된다고 금지하는 거예요. 민중은 그게 싫어요. 사실 그들은 대단한 미래를 바라지도 않아요. 현재도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이렇게 실천보다는 이론이 먼저인 사람, 니콜라이는 딱 그런 사람이죠.


  레빈은 정반대의 인물이에요. 자기가 직접 거기에 뛰어들어 행동하고 실천하죠. 가서 보니까 술 한잔이 그들에게 그다지 큰 피해를 주지 않아요. 또 미래에 대한 걱정은 알겠지만 지금 그 상태로도 충분이 행복한 사람들이니 천천히 개선해나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즉, 레빈은 실존적인 인물이에요. 스스로 시골에 내려가 그들과 함께 몸을 움직여 일하고 그 안에서 변화를 꾀하는 사람으로, 인물 자체로 보면 등장인물 중 레빈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보입니다.    


  문학동네 판 [안나 카레니나]를 번역한 박형규 선생의 해설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의 소설 속에는 악인도 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보통명사는 등장인물 성격의 한 가지 측면만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 스님이 ‘사람은 물이다’라고 표현한 것과 일맥상통하죠. 물은 고요한 곳으로 흘러갈 때는 얌전하지만 폭포를 만나면 거세지죠. 물의 성격이 그렇습니다. 저도 그래요. 나쁜 사람 만나면 거칠어지고, 좋은 사람 만나면 착해지고, 조용한 사람을 만나면 차분해지죠. 이게 저고, 안나고, 브론스키고, 바로 우리들입니다. 때문에 톨스토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주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죠. 극적인 게 아니라 매우 사실적인 거예요.   

 

  다른 곳에 삶이 있다고 믿었던 안나, 인생은 바로 여기 있다고 믿는 레빈,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책을 통해,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들의 마음속에 올바른 재판관을 들일 수 있다는 겁니다. 박형규의 해설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먼 후손들이 꾸준히 그의 작품을 대하며 그것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래요. 제가 이 책에 빠진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분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면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 혹은 어떤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의연히 삶의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 저는 지금도 때때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보며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받은 지도로 길을 찾습니다. 그러면 나를 더 이해하고 상황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8강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바라보다    


  우리는 지금 미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류는 여태까지 우리가 사는 시대만큼 급변하는 시대를 경험한 적이 없어요. 시간과 거리에 대한 해석을 포함한 우리의 전반적인 상태가 그 시대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사람들의 작품은 그들의 삶의 속도를 떠올리며 느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마 끝의 빗소리는 번뇌를 멈추게 하고, 산자락의 폭포는 속기를 씻어준다.    


  처마 끝의 빗소리는 번뇌를 멈춰준다는 것이고, 산자락에 가서 폭포 소리를 들으면 속기俗氣, 즉 세속의 기운이 씻긴다는 뜻입니다. 이런 글들은 요즘 시대에 맞춰보면 현실적이지 않은 여유로운 소리 같아서 울림이 없을 수도 있어요.     


문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들 도리어 누가 되고

부귀가 하늘에 닿아도 수고에 그칠 뿐

산속으로 찾아오는 고요한 밤

향 사르고 앉아서 솔바람 듣기만 하리오    


  라디오도 없고 책도 많지 않았을 시절 산속으로 찾아오는 고요한 밤 솔바람 소리 듣는 게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있습니다. 다산초당으로 가봅시다. 작은 초당에 밤이 찾아왔어요.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인터넷도 없는 곳에 밤이 왔어요. 그러면 향 사르고 등불 켜고 앉아 책이나 읽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아무것도 없이 고요한 밤 풍경에 집중해 솔바람 소리를 듣고 바람에 답하는 풍경 소리 듣고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요즘은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죠. 너무 빨리 움직여요. 뭔가를 더 얻겠다고 바쁘게 움직이는데 왠지 더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한국의 미 특강]을 통해 필명을 날리고 몇 권 더 책을 남기고 별세한 오주석의 책 가운데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 2]가 있습니다. 이 책의 <펴내는 말> 앞머리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푸른 산 붓질 없어도 천 년 넘은 옛 그림, 맑은 물 맨 줄 없어도 만년 우는 거문고

靑山不墨千秋畵 綠水無絃萬古琴    


  오주석은 책을 쓰기에 앞서 자연의 위대함에 대해 먼저 이야기합니다. 벚나무 아래 엄숙할 것 없는 문명사, 자연사보다 결코 대단할 것 없는 문명사, 예술을 한 번도 동경한 적 없는 자연.    


  우리와 같은 시대를 지내면서 옛사람들의 속도로 살다 가신 분이 있어요. 법정 스님이십니다. 이분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지혜의 폭이 넓다는 거였어요. 암자에서 오랜 시간 혼자 계셨는데, 확실히 지식은 바깥에서 들어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나오는 거라는 생각을 했죠. 복잡한 사변과 논리를 지혜로 훌쩍 뛰어넘은 글들은 어렵게 읽히지 않아 더 좋아요. 그래서 법정 스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돈오頓悟,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어요. 아, 이게 삶의 핵심이구나. 문장 하나를 통해 번쩍하고 깨닫게 되는 겁니다.     


 돈오를 살아가는 것이 점수.    


  그리고 그렇게 얻은 돈오를 잊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것이 점수, 차츰차츰 정진하는 거라는 겁니다. 깨달음이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살면서 계속해서 그 깨달음을 기억하고 되돌아보고 실천해야겠죠.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은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점수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돈오하려면 깨달음을 줄 만한 좋은 책들을 찾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장의 마지막을 덮으면서 여운이 남는 글귀들이 있습니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땅에 살고 있는, 현재가 행복한 사람들.    


개처럼 살자. 개는 밥 먹을 때, 어제의 공놀이를 후회하지 않고, 잠을 잘 때 내일의 꼬리치기를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버찌가 열리지 않는다고 화내는 건 어리석다. ㅡ 그리스인 조르바    


필요한 건 그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이방인]의 문장들은 독립적이다. 장편소설 읽듯이 스토리를 이해하며 죽 읽지 말고 문장 하나하나 끊어서 읽어보라.    


  박웅현의 책읽기 방식은 꼼꼼합니다. 보는 눈이 색다릅니다. 시각의 넘어섬입니다. 여유 있게 깊이 들여다봅니다. 고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습니다. 구체적인 책읽기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평을 넓혀줍니다. 소개된 책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책읽기가 조금 더 풍요롭고 행복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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