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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May 18. 2017

종의 기원

정유정 장편소설. 은행나무. 2016년.

   이야기는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한 장면에서 시작하여 시간을 되돌려가며 지난 과정을 짚어가는 것으로 전개된다. 서두부터 끔찍하다.     


   한 가족이 바닷가 펜션으로 여행을 나왔다. 주인공 사이코패스인 한유진의 고의적 범죄(본인의 변에 의하면 전혀 고의가 아닌 사고였다)로 한 살 터울의 형인 한유민을 물에 빠트렸고 아버지는 아들을 구조하려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익사하게 된다. 그 상황을 멀리서 목격한 유진의 어머니는 유진의 범죄를 가슴에 묻는다. 하나 남은 가족인 유진을 보호하려는 모성애가 발동한 것일까! 유진의 이모인 혜원은 정신과 의사로서 유진의 치료를 위하여 별로 살갑지도 않은 한 살 터울의 언니를 설득하고 투약을 결정한다.    


   유진은 형 유민과 판이하게 다른 성격을 보인다. 유진은 과묵하고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유민은 활달하고 수다스러워 늘 어머니 곁에 붙어 있다. 유진이 유민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수영이었다. 유진은 수영에 깊이 몰입하게 되고 수영선수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유민이 죽은 뒤 어느 날 어머니는 유진을 데리고 차를 몰고 가다 교통사고를 낸다. 사고를 당한 할아버지는 과장되게 노발대발하고 그의 손자인 해진이를 불러댄다. 유진과 해진은 같은 반 친구였다. 해진이는 죽은 유민과 흡사하게 닮았다. 죽은 유민을 가슴에 품었던 어머니는 죽었던 유민이 살아온 것처럼 깜짝 반가워하고, 결국 해진의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숨진 후 해진을 양아들로 입양시킨다.    


   한적한 도시 외곽 아파트 단지에 살며 수영선수로서 시합에 참가했다가 쓰러진 사건을 경험한 이후 어머니는 유진의 수영선수를 중단하도록 조치한다. 그러나 유진은 수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어머니는 유진에게 이모의 처방으로 정신과 치료약을 복용하도록 하는 조건으로 수영을 하도록 허락한다.     


   이모는 유진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가 사이코패스이며 그중에서도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프레데터’(순수 악인)라 진단한다. 비둘기의 세상에 태어난 매이자 피식자로 살아가도록 학습받고 억압받으며 성장한 포식자이다.     


   유진은 약을 복용하지 않았을 때 자신의 몸 상태가 최적이 되는 것을 알게 된다. 투약 중단으로 생기는 희열감과 해방감도 느낀다. 그런 상태에서 어둑한 아파트 주변 거리에서 방조제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여자의 뒤를 밟는 스릴을 경험하며 쾌감에 빠지고 종내에는 살인에 이르게 된다.    


   가끔 몰래 집을 빠져나가 방황하는 아들의 뒤를 미행하던 어머니는 유진의 범행을 알게 되고 집에 돌아온 아들이 자살하도록 종용하고 자신도 죽으려 하였지만 유진의 반발에 부딪치고 결국 뜻하지 않게 죽임을 당한다. 그렇게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사실을 눈치챈 이모마저 살해한다. 사건은 계속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해진의 자수 권유를 받고 요구에 따르는 척하며 함께 자동차에 타고 자수하러 가는 중에 교통사고로 바다에 떨어지고 해진은 죽는다. 바다에서 빠져나온 유진은 잠적하고 모든 사건은 해진의 범죄로 세상에 알려진다.     


   유년의 어느 날 몸서리치며 진득한 땀에 젖어 살인자가 되어 허우적거리다 심히 불쾌한 감정으로 잠에서 깨어 뒤척이던 때가 떠오른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 그리고 ‘가인’에 의해 살해된 동생 ‘아벨’, 성경의 이야기는 최초의 인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려준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 ‘셋’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주신다. 창세기의 인류는 가인과 셋의 후손으로 번성하여 온 땅에 퍼지게 된다.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 나타난 첫 범죄가 살인이었다. 인류의 유전자에는 살인자의 피가 섞여 있는 것이다.    


   살인의 충동은 인간의 의식 내면에 깊이 갈무리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충동적으로 표출된다. 가인의 표식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 본성의 민낯을 정유정 작가의 지루하리만큼 세밀한 묘사를 통해 만난다.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한 느낌과 살인, 사이코패스라는 설정에서 오는 저항이나 거부감에 그다지 그 속에 녹아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악에 대한 저자의 지적에 대해 일면 공감은 하지만 그에 대한 어떤 해결이나 예방에 대한 의미는 빠져 있는 것은 한계점일 것이다. 어느 누가 이런 문제에 대해 종교적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해답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인간의 잔혹함에 진저리를 치며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의 제목만 보고 골라잡고 읽은 것인데, 책을 읽은 것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읽으라고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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