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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Nov 16. 2018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27, 18:1-15

  사람의 완전함이란 어떤 것일까?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완전은 부족함을 동반한다. 사람이 완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완전은 사라지고 그 수준에서 무엇인가 부족함이 드러날 것이다. 사람은 피조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다. 생명을 받았고 그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공급받아야 생존한다. 사람의 생명은 의존적이다. 사람은 자존자가 아니다.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로부터 생명유지에 관한 모든 것을 공급받아야 생존이 가능하다. 피조물 수준에서 사람의 완전이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함에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것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모든 것을 의탁하라는 뜻이다. 사람의 완전함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다. 언약이란 당사자 간의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맺는 상호 협약이다. 동등한 조건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그 조약에 대한 이행을 수행하겠다는 약정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특별하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겠다고 선언하신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시고 피조물에게 찾아오심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자기를 피조물 수준에로 낮추심이고 이것은 피조물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의 일이다. 아브라함은 언약의 당사자이면서도 그 언약에 대한 약속을 따라 행하며 지킬 능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시겠다고 하신다. 그런 면에서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수반된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9-10절)    


   언약의 내용은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종족의 머리가 아니라 오는 세대의 모든 자들의 아버지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백성들의 아버지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올 자로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이다. 창세기 3장의 “여인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허리로부터 나올 것을 약속하심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구속사의 거대한 물줄기가 시작됨을 알림이다.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올 자를 통해 믿음의 백성을 일으키겠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선언이다. 언약이 진행될 장소는 가나안이 지목되었다. 가나안은 약속의 후손이 자라날 터전이다. 가나안은 약속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기업이다. 하늘의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눈에 보이는 땅의 기업에 풍성하게 주어질 축복들을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거주하면서 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성취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증표를 몸에 새기도록 할례를 시행하게 한다. 할례는 성례전적이다. 남자의 생식기에 표식을 새기도록 하여 이어지는 생명의 근본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하였다. 약속의 후손들은 할례를 받아 몸에 표식을 갖는다. 자기의 생식기에 주어진 표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였다. 자기들의 후손을 통하여 인류의 구속이 전개되고 성취될 것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성례를 통해 영원한 종말의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을 바라보는 새 백성의 소망과도 일치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영원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성례를 통해 그날을 기대하고 확신한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하고, 사래를 사라라 하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바꾸어주신다.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 의의와 방향을 함의하고 나타내는 표식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개명해 주시는 것은 그들이 앞으로 행할 사명과 관련이 있다.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고, 사라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이름에는 그 뜻이 분명하게 새겨졌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따라 일을 이루실 것이다. 개명된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연약함과 부족한 믿음의 태도로 미진한 모습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후사를 기대하지 못하고 첩의 소생인 이스마엘을 후사로 지목하며,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헤픈 웃음을 웃는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부족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고 그 실행 또한 확고부동하다.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주신다. 그 언약은 사소한 개인의 가정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그 후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을 지키시고 이루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세상의 구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집안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고백함이다. 모든 연약함과 실수와 넘어짐을 바로 세우는 약속에 대한 신뢰의 순종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시고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영접하여 대접한다. 평소 손님 대접하는 것이 몸에 밴 아브라함의 모습이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1)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삶의 윤리이기도 하다. 이 말씀을 따라 아브라함이 손님 대접을 잘하였기에 복을 받았으니 우리도 그렇게 손님 대접을 잘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의미는 없겠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셔서 그 일을 이루심에 대한 보다 분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실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시고 약속을 어떻게 진행하실 것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신다. 믿음이 연약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믿음을 북돋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늙었다. 그 말은 자녀를 갖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사라 역시 본래 불임이기도 했지만 생리마저 끊기고 이젠 도저히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 상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사라는 웃었다. 이 웃음의 의미가 무엇일까?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아는데 어찌 생산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아마도 그런 생각에 웃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라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사라의 웃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지적하신다. 그리고 재차 말씀하신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말씀은 분명하다. 기한이 이르면 사라가 아들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사라는 두려워서 웃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그렇게 웃었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을 이루실 것임을 분명히 하심이다. 믿음 없는 사라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심이다.    


  사라의 이런 행동과 히브리서의 말씀은 일면 일치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사라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사라는 자기의 몸 상태를 생각했을 적에 얼른 믿음을 갖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웃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라의 웃음을 지적하셨을 때 사라는 자기의 믿음을 돌아보았을 것이고 이후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땅에 속하여 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하늘의 일을 땅의 일로 판단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부족한 믿음의 모습을 가질 수가 있다. 아직 장성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믿음일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붙드셔서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시고 보다 굳건한 믿음에로 인도하신다. 장성한 자의 믿음의 분량에 이르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세상에 속하여 살아갈지라도 하늘의 일을 생각하며 살도록 하셨다. 세상의 이치로 따져보아 도무지 믿음을 갖기 어려운 상황일 때에 하나님께서 영으로 깨우치시고 믿음을 갖도록 하신다. 그런 일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모두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일이다.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은혜인 것이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도록 날마다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베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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