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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용현 Dec 04. 2018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자서전. 클레이븐 카슨 엮음. 이순희 역. 

2000년. 바다출판사.


한 사람의 39년의 생애가 이토록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친 사례는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이란 이름이 주는 메시지는 강력하다. 비폭력 저항이라는 슬로건 아래 그가 걸었던 발자취는 너무도 강한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있다.     


미국의 대공황 시기였던 1929. 1. 15. 마틴 루터 킹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사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Sr), 어머니는 알버타 윌리엄스 킹이었다. 아버지의 본래 이름은 마이클 킹 주니어였으나, 1934년 유럽 여행에서 독일을 방문하면서 독일 프로테스탄트 지도자,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마틴 루터)를 기리는 뜻에서 이름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이들 부자(父子)는 마틴 루터 킹 ‘시니어’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되었다. 어머니인 알버타 윌리엄스 킹은 노예제도나 남북전쟁을 통해 부각된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적 사고를 지녔으며,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헌신적이며 도덕적인 사회개혁자로 애버니저 침례교회의 목사였다.     


마틴 루터 킹은 어린 시절 삶의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의 상황을 체험하며 저항의식이 생겨났다. 1944년 14살 때 조지아 주 더블린에서 열린 웅변대회에서 “흑인과 헌법”이란 주제로 연설하여 입상을 하였다. 웅변대회를 마치고 애틀란타의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지시에 화가 났지만 어쩔 수가 없이 90마일을 서서 와야만 했다. 마틴 루터 킹은 평생토록 이때의 경험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흑백분리와 불평등의 관행에 대한 저항의식을 견고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1944년 9월 20일(15세) 모어하우스 대학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불복종운동”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4년 뒤인 1948년 펜실베니아 주 체스터 크로저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라우션부시의 “기독교신앙과 사회적 위기”를 읽고 사회운동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민가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경제적인 조건,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사회적인 조건”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는 종교는 사멸하게 된다고 확신하게 된다. 


1949년 크리스마스 휴가 때 칼 마르크스를 읽고 공산주의에 접하였다. “자본론”과 “공산당선언”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에 관한 해설서도 읽고 공산주의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였다. 첫째,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해석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현세적이고 유물론적인 공산주의에는 신이란 개념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궁극적으로 역사를 이끄는 힘은 물질이 아니라 영혼이다. 둘째, 공산주의의 윤리적 상대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에는 신성정부도 절대적인 도덕질서도 있을 수 없으며, 고정불변의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서 무력과 폭력, 살인, 거짓말 등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셋째, 공산주의가 가진 정치적인 전제주의에 거부감을 느꼈다.    


대학에서 간디 사상에 접하고 강한 인상을 받는다.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바다로 향하는 소금운동과 여러 차례의 단식을 통한 사랑과 진리의 힘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신학교 졸업반 때는 라인홀드 니버의 사상에 접하고 잠시 혼란을 경험한다.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통해 평화주의에 대해 잠시 회의하였으나 결국 현실적인 평화주의에로 돌아오게 된다. 마틴 루터 킹은 “인류가 핵에 의해 전멸될 위기에 직면해 있는데도 교회가 침묵을 지킬 수는 없는 일이다. 비평화주의적인 기독교 교회가 직면한 도덕적 딜레마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평화주의자의 주장은 더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라고 했다.    


22세 때인 1951년 9월에 보스턴 대학의 신학과에 입학을 하였고, 1953년 24세에 성악가를 꿈꾸던 코레타 스콧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녀는 인종문제와 경제적 불평등, 평화문제 등에서 마틴 루터 킹과 동일노선의 사상적 배경을 가졌고 평생 반려자로서 남편의 저항운동을 도왔다.     


1954년 25세에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덱스터 애브뉴 침례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하였다. 이곳은 남부의 흑백 인종차별이 강한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마틴 루터 킹은 흑인 인권단체인 NAACP(전미 유색인종 촉진동맹) 지부에 가입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앨라배마 인간관계 평의회 활동도 병행하였다.    


1955년 26세에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1955년 첫째 딸 욜란다 데니스가 출생하던 해에 유명한 “버스보이콧 운동”이 시작되었다.    


1955년 12월 1일 오후 6시경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백화점 재봉사 로사 파크는 녹초가 되어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1900년부터 몽고메리시에서는 인종에 따라 버스 좌석을 분리시키는 조례가 시행되고 있었다. 몽고메리시의 버스기사들은 백인 전용 좌석이 꽉 차면 관행적으로 흑인 승객들에게 좌석에서 일어나도록 요구해왔다. 당시 운전기사는 백인 좌석이 가득 차 두세 명의 백인 남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로사 파크를 포함한 네 명의 흑인들에게 일어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로사 파크는 인종 차별법인 짐 크로우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55년 12월 5일 이 일을 계기로 흑인 인권단체인 몽고매리 진보연합회가 결성되었고 마틴 루터 킹은 회장에 추대되었다. 흑인 지도자들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이후 일 년 넘게 ‘버스 안 타기’ 운동을 전개했다. 흑인끼리 차를 태워주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고, 말을 타고 다니기까지 했다. 경찰은 불법승차, 불법호객, 불량배 단속 등을 핑계로 탄압했다. 마틴 루터 킹에 대한 살해 위협이 이어졌고 자택이 폭파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956년 11월 13일, 연방법원은 버스에서의 인종 차별이 불법이라는 선고를 내렸다. 흑인 민권운동가 제시 잭슨의 말대로 로사 파크는 “우리가 모두 일어서기 위해 그녀는 앉아야만 했던 것”이고, 마틴 루터 킹은 “우리 모두가 일어설 수 있도록” 앞장서 투쟁했던 것이다.    


1963년 8월 28일.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서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광장에 25만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군중의 눈과 귀는 모두 연단에 선 마틴 루터 킹을 향했다. 이날 그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구절로 유명한 연설, 미국의 인권 운동사는 물론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던 저 황폐한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가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마틴 루터 킹은 저항운동을 하는 중에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지만, “인류의 진보는 기꺼이 신의 협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자신이 그 중심에 서기를 원했다.     


1963년 여름 흑인의 고용과 자유 쟁취를 위한 워싱턴행진이 시작되었고 큰 성과를 거두어 이듬해인 1964년 7월에 시민권 법령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해 12월 35세의 나이로 마틴 루터 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마틴 루터 킹은 이후에도 사회의 다양한 부조리한 체계들과 맞서서 싸움을 계속한다.    


1968년 3월 29일 마틴 루터 킹은 흑인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테네시주 멤피스를 방문했다. 궂은 날씨 탓에 일을 하지 못하고 귀가한 흑인 근로자들은 2시간치 임금을 받은 반면, 함께 귀가한 백인 근로자들은 하루치 임금을 받았던 것. 마틴 루터 킹이 멤피스로 타고 가는 항공편에 대한 폭파 위협 때문에 출발이 지연되기도 했다. 4월 3일 마틴 루터 킹은 메이슨 교회에서 자신의 생애 마지막 연설을 했다. 이 연설 말미에는 폭파 위협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2월 4일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예견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에 투숙한 마틴 루터 킹은 4월 4일 오후 6시 1분, 2층 발코니에 서 있다가 저격당했다. 총탄은 그의 오른쪽 뺨을 뚫고 들어가 턱을 지나 척수를 망가뜨리고 어깨에 박혔다. 당시 나이 39세. 검시(檢屍) 결과 마틴 루서 킹의 심장은 60대 나이 상태였다고 한다. 불꽃같은 삶이 그의 심장을 너무도 빨리 태워버렸기 때문이었을까?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은 미국의 연방 기념일이자 공휴일, 바로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제정되었다. 마틴 루터 킹은 사회의 부조리한 체계에 대해 기독교적인 사랑의 정신에 따른 비폭력저항운동을 하였다. 그의 일생동안 지속적으로 저항운동을 하였고,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기꺼이 헌신하였다. 그의 불꽃같은 투쟁의 흔적으로 인해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를 추모하며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마틴 루터 킹의 삶의 행로를 따라가 보면, 남부 몽고매리에 들어간 이후 시작된 흑백 인종차별에 대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고, 그가 암살당하던 날까지 베트남 전쟁 반대, 빈민운동 등의 사회의 부조리한 체계에 대한 저항운동을 계속한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여전히 억압받는 이들이 있고,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의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이 있다. 마틴 루터 킹이 목격했던 바와 같이, 다수의 침묵하는 자들이 부당한 일을 자행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더 큰 힘을 주어 사회의 부조리한 체계를 이어가게 한다. 그러므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사회악을 조장하고 방조하는 것과 다름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틴 루터 킹은 죽는 날까지 자기 일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보다 사회의 부조리한 체계에 대한 부단한 저항을 하였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였지만 그 어떤 것도 자신이 행해야 하는 사명의 당위를 가로막을 수 없을 알고 행동하였다. 시대가 요구하는 정의 앞에 자신을 기꺼이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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